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비홍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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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우리가 신을 인식하고, 인간으로서 인간의 정신과 감정과 본성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신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인간의 감정과 욕망과 본성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지한 자는 외부의 원인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교란되어 결코 정신의 참다운 만족을 향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치 자신과 신과 사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활하고, 작용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멈춘다.


이에 반하여, 현자는 현자로서 고찰되는 한에 있어서 정신이 거의 동요되지 않고, 자기와 신과 사물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하여 의식하며, 결코 존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정신의 참다운 만족을 향유하고 있다.”(에티카, 제5부 정리 42의 주석에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들, 살면서 만족을 위해 맹렬히 노력하는 모습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인간이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을 때는 누구나 나름대로 어느 정도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활동하는 한에 있어서 나름대로 노력하여 얻은 기쁨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사라지거나, 슬픔 또는 고통으로 변하는 것이 상당히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 같다.


또, 자연 속에서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결국 자연의 법칙과 질서, 사물의 이치, 인간의 정신과 감정과 본성 등에 대한 무지와 착각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무지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절대적인, 자연의 필연적 이치와 상황이 요구하는 것에 의해 압도되어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물질 및 정신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진보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갖가지 예속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헛되거나 거짓된 기쁨이 아닌 참되고 지속적인 기쁨을 향유하기를 바란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진정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 정신의 본성상 이미 결정된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부당한 목적을 위해 이용당하는 것을 알면서 기뻐할 수 없고, 우리가 무지와 착각 속에서 경험하는 기쁨은 우리가 그것들에서 벗어나 참된 인식을 얻거나 기쁨이 슬픔으로 변하는 순간 헛된 것이었음이 판명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렵더라도 외적으로는 우주의 본질 및 특성들을, 그리고 내적으로는 인간의 정신과 감정과 본성을, 정확히 인식하여 자연의 법칙과 질서, 사물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자세를 취하고 그러면서도 자유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향유하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러한 의지가 실현된다면 그 때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능력만큼의 만족을 얻어 누리고, 동시에 아무것도 한탄할 수 없는 평온한 마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자연의 법칙과 질서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우리가 그런 줄 알면서 어떻게 자신의 노력과 능력 이상의 것을 성취하기를 바랄 수 있으며, 자연의 법칙과 질서를 거스르는 것을 욕구하고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신과 자기와 사물을 거의 의식(인식)하지 못하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로서만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맹렬하게 전심전력으로 헛되거나 허망하거나 무가치한 목적에 집착하고 열광하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연의 법칙과 질서, 즉 신의 섭리와 명령을 거스르고 어기며 뜻을 이루어 참된 만족을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자연의 법칙이나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자세는 자연의 이치에 대한 도전, 신의 섭리에 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과신하는 허술한 자가 자기를 포함한 전체 자연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강력한 자연 자체나 신을 어떻게 능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자는 헛수고에 헛되게 집착하는, 허구와 허위에 매몰된 자일뿐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무지한 자, 수동적인 정신을 가진 자, 작용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멈추는 자, 수동적인 감정에 예속되어 휘둘리는 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명한 자, 능동적인 정신을 가진 자, 작용받는 것보다는 작용하는 것이 더 많은 자, 지성을 발휘하여 수동적인 감정을 극복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자, 정신의 참다운 만족과 자유를 향유하는 자는 어떻게 하여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우리의 스승 스피노자는 여기 ≪지성교정론≫과 ≪에티카≫에서의 논리적인 증명과 설명으로써 우리가 신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정신과 감정과 본성과 예속과 자유에 대해서 보다 정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우리를 참된 인식과 자유와 만족의 길로 이끌고 있다.


                                             옮긴이 黃 泰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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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치론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황태연 / 비홍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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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신학정치론≫은 꽤나 까다로운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함에 있어서 나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해서 철저하게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했다.


  문장에 달린 주석은 그것이 스피노자가 달아 놓은 것인 한 빼먹지 않고 옮겼다.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 또한 한 단어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될 때는 [ ]을 사용하여 또 다른 뜻을 병기해 놓았다. 한국어 단어 하나로는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고려하는 것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단어들 중에는 여러 의미를 가진 것이 많다. 저자가 그것을 쓸 때 오직 하나의 뜻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두뇌가 오직 하나의 뜻만을 생각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가령 영어단어 power(라틴어 potentia)는 힘, 능력, 권력 등등의 뜻이 있는데, 스피노자의 논리에 따르면 능력은 곧 권리이며, 권력은 능력들을 양도받아 성립하는 또 다른 능력인 동시에 권리이기 때문에 결국 권리와 능력과 권력은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문장을 읽고 해석할 때는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보며 뜻을 음미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성서와 관련된 내용이 제시될 때 스피노자가 인용하는 성서구절은 성서를 참조해서 번역했다. 다만 성서 그대로의 표현에 따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성서와 이 책의 번역문은 의미와 표현이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를 수가 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스피노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과 글의 논리적 구조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원문의 표현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스피노자의 주장과 그 취지에 잘 어울리도록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인용된 성서 원문의 출처가 거의 모두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궁금한 독자는 대조해보아도 될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서 종교 때문에 박해를 받거나 신앙을 강요당하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해서 박해를 받고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있었다. 또한 종교권력이 나서서 학자들의 생각과 주장을 통제하고 간섭하려 했던 일도 있었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고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것도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람들 중에는 그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스피노자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피노자는 선구자적으로 민주주의의 원리와 의사표현의 자유에 대해 논하며, 최고권력과 개인의 권리, 일반국민의 자유를 관련지어 논하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주의를 집중하여 읽어볼 가치가 많다. 특히 자연권에 대해 논할 때는 철학자다운 관점이 아주 잘 드러나는데, 자연 전체와 신, 자연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자연권을 논하는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안정적이다. 이렇듯 스피노자가 철학 연구에 매진하여 고차원적인 인식에 도달한 덕분으로 우리는 노력과 시간을 절약하면서도 훌륭한 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활용할 수 있게 된 운 좋은 사람들이 될 수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나는 자연의 법칙 및 질서가 곧 신의 섭리 및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물을 예외 없이 지배하고 결정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과 질서이다. 자연의 법칙 및 질서를 어기거나 거스를 수 있는 사물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도 ≪프린키피아≫에서 스피노자와 어느 정도 비슷한 사상을 피력했다. 어쩌면 서로 본질적으로 통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프린키피아 영역본 제3권의 544페이지 ‘일반적인 설명’에는 아이작 뉴턴의 신에 대한 생각이 이렇게 나와 있다.


  “이 실체가, 세계의 혼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Lord)로서,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의 지배 때문에, 그는 주 하느님, 우주의 지배자로 불린다.; 왜냐하면 ‘신’은 상대적인 말이며, 피지배자들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성’은, 신이 세계의 혼이라고 공상하는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그 자신의 몸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피지배자들에 대한 지배이다.


  최고의 신은 영원하며, 무한하고, 절대적으로 완전한 실체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아무리 완전하다 해도, 지배가 없으면, 주 하느님이라고 불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하느님, 당신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 신들의 신, 주들의 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영원, 당신의 영원, 이스라엘의 영원, 신들의 영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의 무한, 또는 나의 완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말들은 피지배자들을 고려하고 있지 않은 칭호들이다.


  ‘신’이라는 말은 보통 주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모든 주가 신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신을 구성하는 영적 존재의 지배이다. 진짜, 최고의, 또는 상상의 지배는 진짜, 최고의, 또는 상상의 신이 된다. 그의 진짜 지배로부터, 진짜 신은 살아 있으며, 이성적이며, 강력한 존재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그의 다른 완전성으로부터는 그가 최고의, 또는 가장 완전한 존재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는 영원하고도 무한하며, 전지전능하다.; 즉, 그의 지속은 영원에서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존재는 무한한 곳에서 무한한 곳까지 이른다.; 그는 모든 것들을 지배하며, 존재하거나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알고 있다. 그는 영원이 아니고 무한이 아니지만, 영원하며 무한하다.; 그는 지속 또는 공간이 아니지만, 지속하며 여기에 존재한다.


그는 영원히 지속하며, 어디에나 존재한다.; 또한 항상 어디에나 존재함으로써, 그는 지속이 되고 공간이 된다. 공간의 모든 입자들은 항상 존재하고, 지속의 쪼갤 수 없는 모든 순간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므로, 확실히 모든 사물의 조물주 신은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지력이 있는 모든 영혼은, 서로 다른 시대에 다른 감각 및 운동기관을 가졌다 하더라도, 가를 수 없는 같은 사람이다. 지속에는 연속하는 부분들이 주어져 있고, 공간에는 공존하는 부분들이 주어져 있지만, 한 사람의 몸, 또는 그의 생각하는 원리에는 전자도 후자도 주어져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은, 그가 인지력을 갖고 있는 존재인 한, 그의 전체 인생 동안, 그의 모든 감각기관들 속에서, 하나의 같은 사람이다. 신은 항상 어디에서나 똑같은 신이다. 신은 사실상 어디에나 존재할 뿐 아니라, 실제로 어디든지 존재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없으면 사실상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 안에 모든 사물들이 포함되어서 움직이고 있다.; 그렇지만 양쪽은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신은 물체들의 운동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물체들은 신이 어디에나 있음으로 인한 저항을 받지 않는다.


  최고의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똑같은 필연성에 의해 그는 항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는 지각하고, 이해하고, 행하기 위한 모든 유사물, 모든 눈, 모든 귀, 모든 두뇌, 모든 팔, 모든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혀 육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지각하고, 이해하고 행한다]. 장님이 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듯이, 그렇게 우리는 신이 모든 것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는 육체나 육체적인 형태가 전혀 없으며, 따라서 보일 수도 없고, 들릴 수도 없고, 만져질 수도 없다.; 그는 그 어떤 육체적 사물의 표현 아래에도 숭배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의 속성들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만,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물체들의 경우, 우리는 단지 그것들의 형태와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바깥의 면을 만지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볼 뿐이다.; 그러나 물체 내부의 본질은 우리의 감각이나 정신의 그 어떤 내성작용에 의해서도 알아낼 수가 없다.: 하물며 신의 본질에 대해서는 더욱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그가 사물을 가장 현명하고 탁월하게 고안한 일과 최종원인들에 의해서 그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완전성 때문에 그를 찬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지배 때문에 그를 숭배하고 공경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종으로서 그를 섬기기 때문이다.; 지배, 섭리, 그리고 최종원인들이 없는 신은, 운명이고 자연일 뿐이다.


맹목적인 형이상학적 필요는, 확실히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것이기에, 다양한 사물들을 산출할 수가 없다. 우리가 발견하는,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 적응되어 있는 온갖 다양한 자연물들은 오직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한 실체의 생각과 의지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비유적으로, 신이 보고, 말하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구하고, 주고, 받고, 기뻐하고, 화가 나 있고, 싸우고, 제작하고, 일하고, 세운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우리의 모든 개념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어떤 비유에 의해 인류의 방식으로부터 취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들의 외양에 의해 신에 관한 많은 것을 논하는 것도 확실히 자연철학에 속한다.”


  유명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글에서도 이런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내가 믿는 신은 여호와도 아니고, 주피터도 아니고, 제우스도 아니다.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했던 말 중에는 스피노자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표현들도 꽤 있다. 유명한 말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특히 스피노자를 대표할 만한 표현이다. ≪에티카≫에서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 신에 대한 지적 사랑에 있다고 논리적으로 증명했던 스피노자! 그가 우리를 위해 남겨 놓은 이 책이 우리에게도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간이 이성적 노력에 의해 성취한, 모든 순수하고 완전한 것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지며 숭고하기조차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이 보존하고 간직해야 할 최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과 조화를 위해 최대로 기여할, 가장 밝고 아름다운 빛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참으로 이성적인 것은 완전성과 아름다움과 유용성을 겸비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저 아름답고 완전하고 사랑스러운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충심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이성적인 것과 그것을 달성한 사람을.

                                         옮긴이  黃 泰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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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피앤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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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황태연



내가 번역하고 피앤비에서 발행한 에티카 번역본은 제본에 있어서 최상급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확인한 결과는 책의 내구성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살펴보고  외양이 별로 멋이 없고 폼이 안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문장들을 읽어나가는 데 별 문제가 없는 책이다.


글자크기가 작아서(10포인트임) 글자를 키웠으면 좋겠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나 번역에만 의존하여 철학적 문제들을 생각하고 연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서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도 처음으로 완역했고, '지성교정론'과 '에티카', '정치론'도 공들여서 번역했다.


나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오래전부터 관심이 깊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도 계속했다. 이러한 연구과정에서 나온 것이 스피노자의 저술들에 관한 나의 번역본들이다.


한국의 철학자들은 외국의 철학에 관련된 학자들의 의견이나 학설을 열심히 추종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런 자세를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대한 외국 학자들의 의견이나 주장은 신중히 참고하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으로 그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추종하는 것은 좀 무분별한 것이다.


인간은 철학서를 사서 읽으면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때 인간은 자기의 어떤 욕망들을 충족시키려고 하는가?


 철학서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욕망들을 품고서 철학서에 관심을 가지는가?


인간이 만약 지적 호기심이나 욕구뿐만 아니라 어떤 허영심도 가지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책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기의 허영심도 충족시키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허영심은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가?   남들의 인정을 받고. 남들에게 자랑삼을 만한 어떤 것을 과시할 수 있을 때 허영심은 어느 정도 충족된다. 인간이 허영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책의 내용에 대한 이해보다 아는 체하는 것을 통해서, 또는 가지고 있는 책의 외양과 고급스러움을 자랑삼는 것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철학서를 읽는 일에 있어서는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이성적인 것이다.


나는 다른 번역서들도 여러 번 읽은 적이 있다.  어떤 번역서는 읽으면 읽을수록 정확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멋없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상한 부분들이나 잘못된 부분들도 알고 표시해 놓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세히 공개하지는 않는다.


실력과 진정성이 부족한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이 반영된 번역서를 읽고 추종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 착각하고 그들에 의해 잘못 이끌리는 것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를 아는 데에 확실히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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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피앤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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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기만당하거나 착각하면 필연적으로 오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하여 힘껏 노력해야 한다.>

 

황태연번역본 에티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이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bakereattack?Redirect=Log&logNo=80149527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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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론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비홍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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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신학정치론≫ 제20장에서 “국가의 목적은, 실제로, 자유이다.”라고 말했던 스피노자는 여기 ≪정치론≫에서 국가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 말하면서(제5장 2절), “시민상태의 목적은 생활의 평화와 안전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최선의 국가는 사람들이 화합하여 생활하고, 법률이침범당하지 않고 지켜지는 국가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신학정치론≫ 제17장에서 “범죄의 기회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국가를 조직하는 것, 모든 사람이, 지위에 상관없이, 사적인 이익보다 공공의 권리를 더 중요시하도록 조직을 형성하는 것, 이것이 애써 이뤄내야 할 과업이다.”라고 말했던 스피노자는 ≪정치론≫ 제5장 2절에서 “만약 어떤 국가에서 다른 국가에서보다 사악함이 더 성행하고 또 범죄가 더 자주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 국가가 충분히 화합을 촉진하지 않았고, 충분히 사려 깊게 국법을 만들지 않았으며, 따라서 국가로서의 완전한 권리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이 논문 전체에서 국민들에게는 인권과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고 국가에 대해서는 안전과 평화, 영속과 번영을 보장하는 법이 제정되어야 함을 줄곧 강조하고 있다. 

 

 ≪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국가와 정치에 관련된 일반적이고 이론적인 이야기를 먼저 한 다음에, 군주국가와 귀족국가와 민주국가에 관하여 순서대로 논하면서 점차로 더욱 발전되고 완전한 정치체제를 다루어 나간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생각하고 있었던 바람직한 정치체제가 궁극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해주는 전개방식이다.

 

 하지만 군주국가에 관해서 논할 때부터 스피노자는 결코 군주나 권세 있는 자들을 옹호하는 논리를 펴지 않으며, 대중을 두둔하는 자세도 보여주지 않는다. 귀족국가에 관해서 논할 때에도 스피노자는 마찬가지로 정치에 있어서의 귀족들의 중요한 역할을 상당히 강조하는 편이지만, 귀족들에 대한 편들기나 민중에 대한 경시를 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단지 모든 인간들의 자유와 복지, 평등과 화합, 국가의 안전과 평화, 영속과 번영일 뿐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이성적이고 민주적인 것이다.

 

 ≪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논한 것들은 그의 ≪신학정치론≫과 ≪에티카≫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고 정확한 인식에 근거를 둔 것들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정치와 법의 제정에 적용하여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원하는 바람직한 정치와 국가의 상태를 실현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논술한 것들은 고도의 완전성을 갖춘 참된 사상으로서 우리가 이성적인 사람으로서 배우고 추구해야 할 것을 정당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황 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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