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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치론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황태연 / 비홍 / 2013년 10월
평점 :
옮긴이의 말
≪신학정치론≫은 꽤나 까다로운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함에 있어서 나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해서 철저하게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했다.
문장에 달린 주석은 그것이 스피노자가 달아 놓은 것인 한 빼먹지 않고 옮겼다.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 또한 한 단어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될 때는 [ ]을 사용하여 또 다른 뜻을 병기해 놓았다. 한국어 단어 하나로는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고려하는 것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단어들 중에는 여러 의미를 가진 것이 많다. 저자가 그것을 쓸 때 오직 하나의 뜻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두뇌가 오직 하나의 뜻만을 생각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가령 영어단어 power(라틴어 potentia)는 힘, 능력, 권력 등등의 뜻이 있는데, 스피노자의 논리에 따르면 능력은 곧 권리이며, 권력은 능력들을 양도받아 성립하는 또 다른 능력인 동시에 권리이기 때문에 결국 권리와 능력과 권력은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문장을 읽고 해석할 때는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보며 뜻을 음미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성서와 관련된 내용이 제시될 때 스피노자가 인용하는 성서구절은 성서를 참조해서 번역했다. 다만 성서 그대로의 표현에 따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성서와 이 책의 번역문은 의미와 표현이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를 수가 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스피노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과 글의 논리적 구조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원문의 표현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스피노자의 주장과 그 취지에 잘 어울리도록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인용된 성서 원문의 출처가 거의 모두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궁금한 독자는 대조해보아도 될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서 종교 때문에 박해를 받거나 신앙을 강요당하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해서 박해를 받고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있었다. 또한 종교권력이 나서서 학자들의 생각과 주장을 통제하고 간섭하려 했던 일도 있었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고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것도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람들 중에는 그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스피노자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피노자는 선구자적으로 민주주의의 원리와 의사표현의 자유에 대해 논하며, 최고권력과 개인의 권리, 일반국민의 자유를 관련지어 논하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주의를 집중하여 읽어볼 가치가 많다. 특히 자연권에 대해 논할 때는 철학자다운 관점이 아주 잘 드러나는데, 자연 전체와 신, 자연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자연권을 논하는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안정적이다. 이렇듯 스피노자가 철학 연구에 매진하여 고차원적인 인식에 도달한 덕분으로 우리는 노력과 시간을 절약하면서도 훌륭한 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활용할 수 있게 된 운 좋은 사람들이 될 수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나는 자연의 법칙 및 질서가 곧 신의 섭리 및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물을 예외 없이 지배하고 결정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과 질서이다. 자연의 법칙 및 질서를 어기거나 거스를 수 있는 사물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도 ≪프린키피아≫에서 스피노자와 어느 정도 비슷한 사상을 피력했다. 어쩌면 서로 본질적으로 통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프린키피아 영역본 제3권의 544페이지 ‘일반적인 설명’에는 아이작 뉴턴의 신에 대한 생각이 이렇게 나와 있다.
“이 실체가, 세계의 혼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Lord)로서,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의 지배 때문에, 그는 주 하느님, 우주의 지배자로 불린다.; 왜냐하면 ‘신’은 상대적인 말이며, 피지배자들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성’은, 신이 세계의 혼이라고 공상하는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그 자신의 몸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피지배자들에 대한 지배이다.
최고의 신은 영원하며, 무한하고, 절대적으로 완전한 실체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아무리 완전하다 해도, 지배가 없으면, 주 하느님이라고 불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하느님, 당신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 신들의 신, 주들의 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영원, 당신의 영원, 이스라엘의 영원, 신들의 영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의 무한, 또는 나의 완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말들은 피지배자들을 고려하고 있지 않은 칭호들이다.
‘신’이라는 말은 보통 주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모든 주가 신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신을 구성하는 영적 존재의 지배이다. 진짜, 최고의, 또는 상상의 지배는 진짜, 최고의, 또는 상상의 신이 된다. 그의 진짜 지배로부터, 진짜 신은 살아 있으며, 이성적이며, 강력한 존재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그의 다른 완전성으로부터는 그가 최고의, 또는 가장 완전한 존재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는 영원하고도 무한하며, 전지전능하다.; 즉, 그의 지속은 영원에서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존재는 무한한 곳에서 무한한 곳까지 이른다.; 그는 모든 것들을 지배하며, 존재하거나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알고 있다. 그는 영원이 아니고 무한이 아니지만, 영원하며 무한하다.; 그는 지속 또는 공간이 아니지만, 지속하며 여기에 존재한다.
그는 영원히 지속하며, 어디에나 존재한다.; 또한 항상 어디에나 존재함으로써, 그는 지속이 되고 공간이 된다. 공간의 모든 입자들은 항상 존재하고, 지속의 쪼갤 수 없는 모든 순간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므로, 확실히 모든 사물의 조물주 신은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지력이 있는 모든 영혼은, 서로 다른 시대에 다른 감각 및 운동기관을 가졌다 하더라도, 가를 수 없는 같은 사람이다. 지속에는 연속하는 부분들이 주어져 있고, 공간에는 공존하는 부분들이 주어져 있지만, 한 사람의 몸, 또는 그의 생각하는 원리에는 전자도 후자도 주어져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은, 그가 인지력을 갖고 있는 존재인 한, 그의 전체 인생 동안, 그의 모든 감각기관들 속에서, 하나의 같은 사람이다. 신은 항상 어디에서나 똑같은 신이다. 신은 사실상 어디에나 존재할 뿐 아니라, 실제로 어디든지 존재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없으면 사실상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 안에 모든 사물들이 포함되어서 움직이고 있다.; 그렇지만 양쪽은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신은 물체들의 운동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물체들은 신이 어디에나 있음으로 인한 저항을 받지 않는다.
최고의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똑같은 필연성에 의해 그는 항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는 지각하고, 이해하고, 행하기 위한 모든 유사물, 모든 눈, 모든 귀, 모든 두뇌, 모든 팔, 모든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혀 육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지각하고, 이해하고 행한다]. 장님이 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듯이, 그렇게 우리는 신이 모든 것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는 육체나 육체적인 형태가 전혀 없으며, 따라서 보일 수도 없고, 들릴 수도 없고, 만져질 수도 없다.; 그는 그 어떤 육체적 사물의 표현 아래에도 숭배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의 속성들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만,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물체들의 경우, 우리는 단지 그것들의 형태와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바깥의 면을 만지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볼 뿐이다.; 그러나 물체 내부의 본질은 우리의 감각이나 정신의 그 어떤 내성작용에 의해서도 알아낼 수가 없다.: 하물며 신의 본질에 대해서는 더욱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그가 사물을 가장 현명하고 탁월하게 고안한 일과 최종원인들에 의해서 그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완전성 때문에 그를 찬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지배 때문에 그를 숭배하고 공경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종으로서 그를 섬기기 때문이다.; 지배, 섭리, 그리고 최종원인들이 없는 신은, 운명이고 자연일 뿐이다.
맹목적인 형이상학적 필요는, 확실히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것이기에, 다양한 사물들을 산출할 수가 없다. 우리가 발견하는,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 적응되어 있는 온갖 다양한 자연물들은 오직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한 실체의 생각과 의지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비유적으로, 신이 보고, 말하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구하고, 주고, 받고, 기뻐하고, 화가 나 있고, 싸우고, 제작하고, 일하고, 세운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우리의 모든 개념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어떤 비유에 의해 인류의 방식으로부터 취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들의 외양에 의해 신에 관한 많은 것을 논하는 것도 확실히 자연철학에 속한다.”
유명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글에서도 이런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내가 믿는 신은 여호와도 아니고, 주피터도 아니고, 제우스도 아니다.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했던 말 중에는 스피노자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표현들도 꽤 있다. 유명한 말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특히 스피노자를 대표할 만한 표현이다. ≪에티카≫에서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 신에 대한 지적 사랑에 있다고 논리적으로 증명했던 스피노자! 그가 우리를 위해 남겨 놓은 이 책이 우리에게도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간이 이성적 노력에 의해 성취한, 모든 순수하고 완전한 것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지며 숭고하기조차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이 보존하고 간직해야 할 최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과 조화를 위해 최대로 기여할, 가장 밝고 아름다운 빛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참으로 이성적인 것은 완전성과 아름다움과 유용성을 겸비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저 아름답고 완전하고 사랑스러운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충심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이성적인 것과 그것을 달성한 사람을.
옮긴이 黃 泰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