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삼국지평화 - 삼국지 이전의 삼국지, 민간전래본
김영문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평점 :
먼 훗날, 제갈량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한(前漢) 때는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배를 멀리했기 때문에 흥했고, 후한(後漢) 때는 소인을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하여 쇠했습니다.”-출사표(出師表)-
그러나 <삼국지평화>를 이야기하고 듣는 사람들은, 그 원인은 좀 더 먼 데 있다고 보았다. 한 고조 유방의 공신이었으나 토사구팽당한 한신, 영포, 팽월의 원혼이 옥황상제에게 읍소하여 한나라를 삼분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민중들은 승리자 유방에 대한 반감과 더불어, 앞선 항우를 비롯하여 패배자들을 깊이 연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민중에 대한 지배의 정점에는 황제가 있으며, 황제는 앞선 왕조에 대한 승리자였다. 민중들이 패배자를 동정하고 사랑하는 것도 권력 구조로 보면 자연스러운 것일까. 사마천이 <사기>에서 비장하게 항우를 노래한 이래, 그것이 경극 <패왕별희>로까지 만들어진 것을 떠올리게 된다.
한은 결국 <삼국지평화>에서 한신의 환생이라는 조조와 그 아들의 손에 망하고 말았다. 이로서 한을 세운 유방도 응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망한 한을 유비는 촉한이라는 이름으로 이었다. 촉한은 조씨 가문의 모사꾼이었던 사마의의 아들들에게 결국 망하고 말았지만, 사마씨도 승리자의 자리에 오르면서 이들은 마침내 민중들의 원망을 받고, 그에 힘입은 또 다른 인물, 흉노족의 유연의 손에 패업을 빼앗기고 만다. 그런데 <삼국지평화>는 유연이 다름아닌 촉한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삼국지평화>에는 두 가지의 주제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사기> 이래 역사와 문학의 끝없는 테마였던 복수극이요, 다른 하나는 당대 민중들에게 자리잡고 있던 불교의 인과율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훗날의 <삼국지연의>에 비해 <삼국지평화>는 불교적 색체는 극히 미미한 것이 사실이나, 곳곳에 나오는 사찰, 승려 등의 존재는 ‘삼국지’를 소재로 한 그 장대한 흐름이 어디로 흐를 것인지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흐름 속에서 또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유비의 존재였다. 한 왕조의 희생자인 팽월의 환생이기도 하나, 한편으론 그 스스로가 한 황실의 일원인 중산 정왕 유승의 후예로, ‘황숙(皇叔)’이라 불리는 인물이니, <삼국지평화>의 구성으로 볼 땐 가장 기괴한 구성의 인물이다. 한 황실을 무너뜨리기 위해 태어났으면서도, 그 한 황실을 중흥해야 하는 숙명이 유비에게 주어져 있으니, 이런 이중적인 설정은 결코 <삼국지연의>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정상의 유비가 아닌, <삼국지평화>는 유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의외로 유비는 생각보다 그리 비중 있게 다뤄지진 않는다.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긴장감,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유명한 에피소드는 그 태반이 나오지 않는다. <삼국지평화>를 좋아하면서도, 이 책은 <삼국지연의>보다는 문학적인 재미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한편으로는 나관중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알겠다. 그러나 하나의 문학이 아닌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삼국지평화>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텍스트이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이유로는, 유비의 상(像, image)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삼국지평화>에서는 제왕으로서의 유비는 멀리 가 버린 듯하다. 오히려 유비는 두목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삼국지연의>에서 효성 깊고 검소한 인물로 첫 등장을 하는 것과는 달리, 술을 즐기며 자못 호탕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어떤 점에서 폭력의 잔혹성은 <삼국지연의>보다는 <삼국지평화>가 더한 점이 있는데, 이는 독우에 대한 처벌에서도 두드러진다. 독우를 끔찍하게 죽인 유비 일행은 태항산으로 들어가 산적 두목이 되었다고 하나, 당시 황제였던 헌제의 회유로 다시 귀순하기에 이른다. 이 부분은 길지는 않으나 충의지사였던 유비보다는 두목으로서의 유비의 모습이 두드러지므로 <삼국지평화>를 볼 적에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조조에게 쫓겨 장판파로 향할 적에 유비는 자신을 따르는 수없이 많은 백성들을 보게 된다. 그들 때문에 위기에 처했지만 유비는 군사들의 행군을 늦추도록 하니, 백성들을 조조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무모함을 강조하는 신하들을 무마하며 감동적인 연설을 하던 유비는 없다. <삼국지평화>의 유비는 별다른 말은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백성들이 자신을 따르는 일의 득실을 살펴보고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두목스럽고, 때론 음흉하기까지도 한 유비. 그러나 그 모습이야말로 유비가 한 황실의 후예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 고조 유방은 풍패에서 술을 마시고 호걸들과 사귀는 것으로 소일하였으며, 그의 곁에는 향리의 온갖 말썽꾼들이 몰려들었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정복한 뒤로는 백성들을 간단한 법으로 다스린 것이라든지, 함양 약탈을 금지한 것은 백성들을 사랑해서라기보단 천하를 도모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이는 한편, 위기에 몰릴 땐 인질로 잡힌 아버지나 부인(훗날의 여태후)의 안위는 신경쓰지 않음은 물론, 항우의 군에 쫓길 때는 아이까지도 내던지려는 냉혹함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이런 인격적 결함이야말로, 한 고조의 면모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