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양심 - 일본 헌병 쓰치야 요시오(土屋芳雄)의 참회록
하나이카 야스시게 지음, 강천신 옮김 / 지문당(JIMOONDANG)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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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으리라.”(p.17)

 

일본 관동군 헌병이었던 쓰치야 요시오가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저주했다. 제 손으로 중국 민중 328명을 죽였고, 1917명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감옥에 보냈던 그 끔찍한 과거를 뉘우치면서.

 

성장기에 가난과 울분을 곱씹다

쓰치야 요시오는 1911, 일본 도호쿠 지방의 야마가타 현의 좁고 더러운 집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그가 태어날 무렵부터 가난은 대물림되는 것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소년 시절부터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지주 집안에서 머슴으로 일하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지주제의 모순을 견디다 못해 철도 노동자로 취직하였으나, 가난은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관헌들과 결탁한 지주들은 횡포를 부리며 간신히 마련한 논밭을 마구 빼앗았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어.”(p.26)

힘 없는 민중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악마의 길을 가다

가난하다고 나를 바보 취급하던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대륙에는 왕도 낙토가 있다.”(p.41)

일찍이 겪었던 울분, 그리고 만주에 품은 환상. 군인이 되면 바보 취급하는 가진 자들이 더 이상 함부로 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만주에서는 나도 땅 한 뼘은 가질 수 있으리라, 쓰치야 요시오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일본은 중국 동북의 만주 지역을 침략한 만주 사변(1931)을 일으켰다. 만주 지역의 일본군 핵심 전력은 관동군이었는데, 쓰치야 요시오는 1931년 이 관동군에 신병으로 입대했다. 그는 여기서 관동군이 중국 민중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천황의 군대가 이런 지독한 짓을 하다니.”

어린 시절, 쓰치야 요시오는 할머니로부터 벌레 한 마리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따뜻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상관은 배짱을 시험한다라는 명목으로, 쓰치야 요시오에게도 중국인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라고 명령했다. 당시 일본군에게는 상관의 명은 곧 천황의 명이었고, 이것은 쓰치야 요시오 생애 최초의 살인이 되었다.

중국인은 인간이 아니고 벌레와 마찬가지인 짱꼴라라고 생각했다. 군대에서 그런 벌레 같은 놈을 처치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며, ‘천황을 위해, 야마토(일본) 민족의 번영을 위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관동군에서는 중국인을 한 사람이라도 많이 죽여야 공이 된다고 보았다. 나는 군대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계급에 오르고 싶었다. 공을 세워 훈장을 받고 싶다며 얼른 출세하겠다는 욕심에 불탄 나는 어느 사이에 천황의 군대(황군)의 살인 도구로 변해버린 것이다.”(p.45)

벌레 한 마디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쓰치야 요시오는, 이제 벌레 같은중국인을 죽이고 말았다. 할머니의 가르침은 잊혀지고, 인간의 양심은 끊어지고 말았으며, 쓰치야 요시오가 인간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아직도 그 아득한 길을 지나야만 했다.

 

관동군 헌병이 되었다

사람을 죽여 공명심을 채우려 한 쓰치야 요시오는 결국 헌병이 되었다. 헌병이란 경찰 업무를 하는 군인으로, 일본 제국 시기에 절대 권력을 갖고 군인과 군속(군무원), 민간인을 다스렸다. 당시 일본 헌병은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한다고 할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였던 만큼, 쓰치야 요시오가 바라던 것들을 분명 이룰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전쟁 시기에 헌병이 되어 권력을 쥔다는 것은 곧 어마어마한 살육을 뜻하게 될 것인 바, 곧 그 손을 중국 민중 수백 명의 피로 물들이게 될 것을 그는 짐작했을까.

고문은 처음에는 누구라도 흠칫거리며 한다. 그러나 매일 반복하니 나는 이제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피의자에게 죄가 있든 없든 관계없었다. 체포하면 마지막에는 이 자식(중국인)’은 살려 둘 가치가 없다라고까지 생각해 인간의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살인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헌병이나 경찰 중에는 체포된 자를 모두 악인(죄인)으로 간주, 그에게 아무리 비인간적인 고문을 가해도 묵인하거나 장려하는 풍조가 있었다. 관리통제를 받는 속에서는 인간다운 마음을 드러내면 배척받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수치라 생각해 나 역시 그런 마음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비인도적인 잔학 행위의 온상이 됐다.”(p.55)

관동군 치치하얼(齊齊哈爾) 헌병대에 배치된 쓰치야 요시오는 이곳에서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다. 그 죄를 뉘우치는 것은 훗날 일본이 패배하고 전범 수용소에 갇힌 때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헌병대 조직 안에서 우리 하급자들은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만에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 면직당하든지 전근되는 운명이 기다릴 뿐인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 관리와 통제에 얽매이고 입신출세와 공명심이 부추겨질수록 그 차이에서 오는 마음의 불안감도 커졌다. 그 불안감이 방아쇠가 되어 차별사상에서 오는 흉포함만 커졌다. 그런 헌병으로서 권력을 가진 것이 내 악행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p.89-90)

쓰치야 요시오는 헌병이 되어서 출세했지만, 헌병에게 출세란 곧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었고, 사건이란 항일 투사나 민간인을 피의 제물로 삼는 것이었다. 전쟁 시기의 출세라든지 권력이란 다름아니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인간의 양심

쓰치야 요시오는 유능한 헌병이었고, 이것이 그를 더더욱 아귀지옥으로 이끌고 만다. 그는 자신이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다고 고백하였는데, 그 중에는 교사 출신으로 중국 국민당 지하조직의 핵심 인물이었던 염유문(閻幼文)의 일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야기도 있었다.

1942, 치치하얼 헌병대는 염유문을 잡기 위해 그 부인을 끌고 와 가혹한 고문을 가했으며, 그녀는 결국 큰 병이 들고 말았다. 그녀의 딸과 늙은 모친이 찾아와 피눈물을 흘리며 쓰치야 요시오에게 그녀를 살려달라고,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쓰치야 요시오는 매몰차게 그들을 내쫓았다. 염유문의 부인은 병에 걸린 채 방치되었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달 뒤, 염유문도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고, 쓰치야 요시오는 다음 해 더 처절한 소식을 듣게 된다. 딸 부부를 모두 잃은 늙은 모친은 홀로 가난과 싸우며, 딸이 남긴 손녀를 키우다 먹을 것이 떨어지자 결국 철도에 투신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쓰치야 요시오는 어린 시절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딸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던 노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야마가타의 할머니 얼굴이 어른거렸다.

아무리 작은 벌레라도 생명이 있는 법이란다라고 가르쳤던 할머니였다. 가난했던 할머니. 그 할머니가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라고 무섭게 노려보는 것 같았다. 환청이겠지만 엄마, 엄마하고 우는 여자아이 소리도 들렸다. 남겨진 어린 두 자매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할머니에게 의자를 내어 준 착한 여자아이였다. 나는 그 가는 팔을 움켜잡아 엄마에게서 떼어 놓았다.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버렸다.

그 애들은 그 후에 분명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가난에 시달렸을 것이 틀림없다. 일본군 헌병인 나를 갈기갈기 찣어 죽여도 모자라 원한을 품고 있으리라. 그것을 생각하니 나는 몸이 굳어졌다.”(p.164)

염유문의 병든 부인을 찾아 온 늙은 모친과 딸은, 아무래도 그녀가 오래 살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셋은 부둥켜 안고 울었건만, 결국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노파의 죽음을 전해듣고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린 쓰치야 요시오에겐, 자신이 노파를 죽였고, 그것은 곧 자신의 할머니를 죽인 것으로 느껴진 듯 하다. 가난하고 힘없이 살아 울분을 지녔던 쓰치야 요시오가, 이제 자기 손으로 가난하고 힘 없는 민중들을 죽이고 있었다.

양심을 잃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했던 것, ‘위안소를 찾았던 것뿐 아니라, ‘사람들의 괴로움을 보고도 태연하게 지나칠 만큼되어 버린 것을 쓰치야 요시오는 양심을 잃은 것이라 이야기한다.

어느 겨울 쓰치야 요시오는 사복 차림으로 산양을 사냥하러 갔다가, 옷도 이불도 없이 벌거벗은 채 사는 아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집에 가 보니 아이들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것만도 벅찬상태였고, 그 아이들의 어머니는 남편이 노무자로 징집되자(아마도 노역 뒤 학살되었을 것) 홀로 가난을 파고드는 추위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쓰치야 요시오는 아이들의 어머니에게 20엔을 주었는데, 그녀는 공손하게 쓰치야 요시오를 배웅하였다. 쓰치야 요시오는 이 일을 뒤늦게 후회하였다.

나는 관동군 헌병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흉포한 일본 침략자의 앞잡이였다.

그 아이들의 아버지를 노동자 사냥하여 진지를 구축하러 보낸 끝에 살해하고 가족까지 비참한 생활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제 와서 나는 후회한다. 나도 사람의 자식이었다면, 그리고 한 조각이라도 양심이 있었다면 그때 왜 내 셔츠 한 벌이라도 벗어서 그 아이들에게 입혀주지 않았던가, 왜 산양 한 마리를 그 집에 두고 오지 않았던가하고.

그 무렵 중국 농민들은 천 한 조각도, 솜 한 줌도 구하기 어려웠다. 물자가 없었다. 20엔 따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고백은 이어진다.

나는 지금 사람들의 괴로움을 보고도 태연하게 지나칠 만큼 양심을 잃었던 나를 돌아본다. 입신출세욕과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욕구를 채우는 데에만 급급했던 나 자신이 보였다.”(p.174)

 

악마에서 인간으로 돌아오기 위한 먼 길을 걷다

삼국지연의에는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남만왕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았지만 일곱 번을 모두 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갈량의 용서에 맹획은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충성을 맹세하게 되는데,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뒤, 쓰치야 요시오의 삶 또한 이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 패전 뒤 쓰치야 요시오는 소련군에 포로로 잡혔고, 5년간 복역한 뒤 중국 무순의 일본전범관리소(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죽음을 각오했었으나 중국은 오히려 이들을 정성스레 대접하였다. 의외라고 느꼈던 쓰치야 요시오는 처음에는 은근히 우월의식마저 느낄 정도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점점 자신의 과거를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공명심과 내 입신출세를 위해 죄 없는 중국인들을 체포하고 고문했다. 체포한 중국인들에게 이발은커녕 목욕 한 번 시키지 않았고 병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벌레 같은 것들이라는 생각에 약조차 주지 않았다. 물도 음식도 주지 않았다. 그들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식을 살려달라는 그들 부모의 필사적인 호소도 들어주지 않았다. 바로 이 손으로 그들을 죽여 왔던 것이 아닌가.

그런 내가 중국인들에게 부모도 해주지 못할 정도의 이런 애정을 받아도 되는가. 그것을 묵묵히 받고만 있어도 될까.

정말 못할 짓을 했다, 정말 악랄한 짓을 했다, 사형을 당해도 싸다. 나는 점점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p.232-233)

1954, 수용소에서는 본격적으로 일본 전범들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하는, 인죄(認罪) 운동이 일어났다. 전범들은 하나 둘 자신의 죄상을 고백하였다. 쓰치야 요시오는 자신의 구체적인 죄를 고백하는 전범들이 목숨을 걸고 자신 안의 악귀와 싸우는그 용기 있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자기 죄를 고백하게 되었다.

나는 일본의 침략에 참여항 만주에서 저지른 내 범죄의 모든 것을 며칠에 걸쳐 쓰기 시작했다. 자기 손으로 자기 죄를 종이에 기록하는 일은 중국인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 이상으로 용기가 필요했다. 기록한 내용은 앞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죄에 대한 죄책감을 평생 업고 살아가야 한다. 나는 그 두려움 때문에 처음에는 그리 죄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내용만 썼다. 나 자신도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잔인한 일은 도저히 쓸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둘 쓰는 사이에 점점 중한 죄도 스스로 고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단단히 각오하고 쓰기 시작했다.”

결코 사라지지 않을 죄, 그리고 결코 지워지지 않을 죄책감을 쓰는 두려움. 이어지는 고백에서 쓰치야 요시오는 자신이 328명을 죽였고, 1917명을 검거하여 탄압했다고 했으나, 그 숫자의 이면을 직시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내가 범한 침략과 가해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미쳤다. 가족 중 누군가가 헌병인 나에게 검거되면 주변 사람들이 남은 가족들을 경계했고, 생계를 이어나가기가 어려워져서 그 때문에 자살한 사람도 나왔다. 또 혐의가 없어 석방된 자도 고문 후유증으로 병사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런 사람은 앞에 말한 숫자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 수를 정확하게 포함하면 내 범죄행위는 헤아릴 수가 없다.”(p.238)

중국의 전범 조사를 쓰치야 요시오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악마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쓰치야 요시오는 절망적으로 다짐했다.

인죄운동으로 우리가 가해한 죄를 고백했다고 하여 금세 참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악마가 되어버린 자신의 흉악함은 싫어도 일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 두 번 다시 내 몸속의 그 흉악함을 규범 삼아 살아가지 않기 위해, 언제나 반성이라는 자기투쟁을 계속해야만 한다.”(p.239)

자기가 저지른 흉악한 죄는 일생 동안 씻을 수 없기에, 남은 생을 반성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는 제 손으로 죽인 이의 가족들을 방문하여 무릎을 꿇고 피눈물로서 사죄하였다. 물론, 피해자의 가족들이 결코 그를 쉽사리 용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느 가해자가 진심으로 자신의 반생이 죄악으로 가득 찼음을 인정하고, 자신을 씹어먹어도 모자랄 이들 앞에서 용서를 구한단 말인가. 쓰치야 요시오의 반성과 사죄는, 일본 천황이나 총리의 사죄의 무게보다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물론, 쓰치야 요시오가 반성을 하게 된 계기로는, 당시 중국의 경제성장과 공산당의 선전 또한 유효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쓰치야 요시오가 일본으로 돌아간 해이자, 마오쩌둥의 큰 실책으로 남게 된 경제정책인 대약진 운동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1956년의 일이다. 쓰치야는 수용소 동료들과 함께 당국의 승인을 받아 중국 곳곳을 답사하면서, 자신들이 지옥으로 만든 중국이 마치 인민들의 손으로 재건되었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전범들을 극형에 처하는 대신 자비롭게 교화하고, 아울러 중국의 발전상을 선전한 것에는 물론 중국의 치밀한 의도가 있었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죽어 마땅할 것으로 생각한 쓰치야 요시오에겐 분명 이것이 철저한 자기 반성의 계기가 되었던 것을 주목할 만 하다.

 

어제 중국에서 온 편지 안에 쇼키(鐘馗, 역신을 쫓는 귀신인 종규)’ 그림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귀신입니다. 쓰치야 씨도 귀신입니다. 귀신이었던 쇼키님은 인간을 위해 좋은 일을 해서 마침내 신이 되엇습니다. 쓰치야 씨도 귀신은 귀신이라도 인간에게 좋은 일을 하는 귀신입니다라고 편지에 써주었습니다. 피해 국민이 가해자인 나에게 해준 말입니다.”(p.304)

종규는 당나라 현종의 꿈에 나타난, 역신을 잡는 귀신이었다. 쓰치야는 극악무도한 죄악을 저지른 귀신과도 같았다. 스스로도 용서받을 길 없으리라 생각할 정도였다. 그가 다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좋은 귀신이라면 그로서도 어찌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중국의 소년이 이야기해준 종규의 고사는, 쓰치야에게는 가장 처절하고도 감동적인 용서가 아니었을까.

 

쓰치야는 그 뒤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평화로운 일본을 만들기 위해 힘을 쓰다 마침내 죽고 말았다. 그의 삶과 죽음의 교훈은, 인간은 언제든지 잘못된 사회에서, 잘못된 행위로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절망, 그리고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철저한 자기 부정마저도 감당할 수 있다는 데서 어떤 희망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을 펴내고 소개해 준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진심으로 쓰치야 요시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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