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체셔 크로싱 - 소녀들의 수상한 기숙학교
앤디 위어 지음, 사라 앤더슨 그림, 황석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2월
평점 :
마션과 프로젝트 헤일메리로 유명한 앤디 위어의 신작이 나왔다. 사실 쓰여진 건 한참 전이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품들보다 먼저 쓰여졌는데, 작가가 출판을 목적으로 쓴 내용도 아니었는 데다가 그림이 더해진 '그래픽 노블' 장르였던지라 여태 묻혀있던 것을 몇 출판사들이 발표해보자고 하였고, 사라 샌더슨이 그림을 맡게 되면서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앤디 위어와 사라 샌더슨의 그래픽 노블이라는 것부터가 너무나 구미를 당기게 하였는데, 번역은 심지어 초월 번역으로 유명한 번역가 황석희 씨가 맡았다고 하니, 내용을 더욱 보고 싶은 마음이 배가 되지 않는가.
때마침 좋은 기회인 서평단 모집 이벤트를 만나게 되어 신청하였고, 그렇게 '체셔 크로싱'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책은 짧고 압축적인데, 책을 빠르게 읽는 사람들이라면 30분도 안 되어 내용을 다 볼 법한 정도다. (나는 40분 정도 걸렸다.)
인쇄는 깔끔하게 되었고, 번역 또한 잘 되었다. 다만, 내용이 너무 압축적인 탓에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따라가기 버거운 장면이 몇 있다.
더 확실히 내용을 즐기고 싶다면 원작이 되는 피터팬과 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최대한 원작에 가까운 버전으로 읽어 본 후에 다시 본다면 더욱 잘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
가장 흥미가 있던 지점은 초반 부분이다. 아이들이 한 데 모여서 주고 받는 내용에서 드러나는 아이들의 성격과 아이들이 진단 받았던 정신과적 병명 같은 것 말이다.
남들이 겪지 못한 일을 무시무시한 일을 겪고 죽을 힘을 다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왔는데, 믿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어른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미친 취급하며, 치료하고 교육하려고 애를 쓰기 바쁜 것이다. 사실상 아이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미쳐버린다. 이 세계에서는 자신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줄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체념하고 냉소적으로 변해버린다.
그러나 같은 세계에서의 경험은 아니나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을 만나자, 아이들은 금세 쉽게 융화된다. 세상의 취급으로 까칠해져버린 성격은 여전하지만 상대의 경험을 함부로 가짜라고 몰지 않는다. 거짓말이라고 치부하지 않는다. 내가 원더랜드에 있었듯, 너는 네버랜드에 있었구나. 내가 네버랜드를 겪었듯, 너는 오즈에 가봤었구나. 서로 다른 세계로 차원 이동을 했고, 서로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알 수 없어도 아이들은 서로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들어준다. 그래서 아이들이 모두 차원 이동자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몇 년 전의 그 기억과 경험을 잃지 않고 여전히 그것을 바탕으로 싸우고 모험할 수 있는 게 아니었을까? 원더랜드가, 네버랜드가, 오즈가 정말로 있다고 믿고, 의심하지 않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였기 때문에? 그러니 서로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함께 차원 이동을 했으니 말이다. 아이가 아닌 어른인 유모인 메리 포핀스도 아이들과 함께 차원 이동을 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의 경험을 진정으로 믿는 마음. 거짓이 아니라고 믿는 마음 덕분에 그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네버랜드에도, 카드 모형이 사람으로 변해 돌아다니는 원더랜드에도, 사람의 심장을 갖고 싶어하는 양철 깡통이 말하고 돌아다니는 오즈에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메리 포핀스에 대해 보면 웃기고 짠한 지점이 또 몇 있는데, 아이들의 장난에 이골이 나서 장난스러운 아이들을 지옥의 요정 취급 하면서도 결국은 아이들을 지키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서쪽 마녀와 싸운다는 것이다. 우산을 펼쳐, 사악한 마법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 마법에 걸려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다가 다시 되살아나서도 아이들을 지키러 또 참전한다니. 이보다 더 대단한 유모가 있을까!
앤디 위어는 이처럼 영리하게도 우리가 서양의 어린이 작품에서 만날 수 있었던 여성 캐릭터들을 한 데 모아 어벤져스를 결성시킨다. (주요 등장인물을 모두 여성들로 구성하고 그들끼리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한다는 설정까지도 마음에 든다. 디즈니의 공주 동화와 만화만 보고 자란 소녀들보다 이 모험기를 읽은 소녀들이 페미니즘과 여성연대적으로 훨씬 더 좋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격이 삐뚤빼뚤 모나고 여러 차례 자신의 말을 의심 받고, 미쳤다는 전제 하에 각종 실험을 받아, 아주 염세적으로 변해버린 애늙은이 같은 아이들이, 결국은 아이 같은 그 찬란한 동심과 의심하지 않고, 거짓이라 함부로 단언하지 않는 모습들로 함께 힘을 합쳐, 세상을 또 한 번 구해내는 것이다.
길지 않은 내용이었음에도 읽으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린 부분이 몇 있었는데, 사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웃픈' 지점에 가깝다. 어떤 장면이었냐면, 맨 처음 아이들이 막 만났을 때, 웬디는 머리를 자른 상태였다. 네버랜드에서의 기억이 남아있는 채로 조금 더 큰 모습의 웬디는 그때의 긴머리가 아니었다. 훨씬 더 활동적이고 능동적인 모험가로서의 외형으로 만날 수 있게 된 웬디가 몹시 반가웠고, 아이들 중 가장 성숙한 모습을 보여 네버랜드에서의 "더이상 자라지 않는 아이들"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지점이 약간 씁쓸하고,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방에 갇히자마자 도망가려고 창문을 살피는 앨리스가 창문이 닫혀있는 것에 분통을 터뜨리는데, 앨리스는 원더랜드에서 몸이 커지고 작아지는 약을 잘못 먹는 바람에 좁은 집에 갇힌 기억이 있다. 때문에 폐쇄적인 공간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약간의 폐쇄 불안증처럼 보이는 앨리스와 반면, 웬디의 경우는 창문으로 피터와 요정들이 날아왔던 기억이 있어, 아무래도 창문은 열려있는 것보다 닫혀있는 것을 선호하는 것도 원작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심리 상태와 성격을 설정하여, 읽는 독자로 하여금 원작의 내용을, 그로 인해 아이들의 심리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영리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는 재미도 재미지만, 정말 탁월한 분석력이라고 앤디 위어의 칭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도로시까지 합세했을 때, 각자 어떻게 차원 이동을 했는지 차원 이동의 방법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가 있는데 웬디와 도로시는 자세하게 말한 반면, 앨리스는 "그딴 거지 같은 데 안 가." 하고 말하는 게 정말 웃기고 짠했다. 아마 일반적인 번역으로 했다면 '그런 기분 나쁜 곳은 안 가'라든가, '그따위 곳에 가기 싫어' 정도로 해석할 수 있었을 텐데, 황석희 번역가가 요즘 아이들 말투로 잘 번역한 대사라고 느꼈다. 그딴ㅋㅋ 거지 같은 데ㅋㅋㅋㅋ 안 가ㅋㅋㅋㅋㅋ
마지막으로 또 한참 웃었던 지점은 피터가 앨리스와 함께 보팔 검을 빌리러 갔을 때였다. 수수께끼를 맞춰야만 보팔 검을 내어주겠다는 말에 앨리스는 원더랜드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하는데, 피터는 앞뒤 안 재고 냅다 주먹을 꽂아 수문장을 재우고 보팔 검을 획득한다. 이 부분도 참 웃기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웃픈' 지점이 아닐 수 없다. 피터가 앞뒤 안 재고 폭력을 쓰는 부분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네버랜드는 정말 아이들이 있기 힘든 곳인 점이 엿보인다. 아이들이 폭력을 계속해서 쓸 수 밖에 없는 곳. 웬디가 호신용 칼을 갖고 다니는 것과 같은 이유다.
차원을 넘나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서쪽 마녀는 이제는 성이 아니라 차원 전체를 아우르려고 애를 쓰지만, 차원 이동 능력자가 셋이나 되는 상황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마법이 제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이쪽도 마법을 쓰는 메리 포핀스가 있는 데다가 애초에 쪽수로도 한참 밀리니 어쩔 수 밖에.
그리고 후크 선장의 외모에 대해서는 할 말이 좀 많지만... 그는.... 원작에 따르면 엄청난 미남이었어야 하는데 이 구리구리한 수염 기른 아저씨는 또 뭐고, 서쪽 마녀에게 왜 이렇게 기름지게 대하는 건지... 굉장히 불만스러웠다.
사실, 러브라인도 있다고 서문에서 밝히기에 기대를 좀 해보았는데, 러브의 러 자도 시작하지 못하고 대충 썸만 탄 상황에서 (후크 선장이 죽을 때보면 서쪽 마녀는 그렇게 애틋하거나 슬퍼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별 마음이 없었는지도...) 흐지부지된 관계라 이건 러브라인이라고 볼 수 없겠는데? 싶었다.
게다가 이 작품은 그래픽 노블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이야기 자체를 굉장히 압축해놓은 느낌이 든다. 전개가 한국의 아침드라마 저리가라 수준이다. 가령 메리가 액체로 변해버린 후에 아이들이 크게 슬퍼한다거나 꽃병을 챙겨서 메리(였던 것)를 잘 담아서 교장에게 가져다주는 장면 등은 다 생략되고 없다. 서쪽 마녀도 계속 후크 선장의 배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구경해볼 법도 한데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은 것도.
너무나 생략된 장면이 많다는 점이 확실히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전개가 너무 빨라서 눈이 팽팽 돌 지경이기도 했다.
앤디 위어가 프로젝트 헤일메리처럼 두꺼운 책으로 이 내용을 다뤘다면 아마 위에서 언급했던 이야기들에 이런저런 살도 많이 붙고 전개도 제 속도를 갖춰 조금 더 매끄러울 것 같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내용이었고 읽는 내내 만화책을 읽는 것처럼 즐거웠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아이들에게 접해도 무리 없는 (어쩌면 조금 유치하게 볼 수도 있겠다.) 내용이라 괜찮을 것 같다. (사람이 마법으로 액체가 되는 장면 빼고는..... 모 사이트 웹툰 성형수가 떠오르는 부분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읽으면서 재미있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큰 압박과 결심 같은 거 없이도 쉽게 술술 읽을 수 있는 가볍고 즐거운 책!
*이 서평은 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RHK)에게 도서를 제공 받아 쓰여졌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