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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에게서 온 편지 : 멘눌라라 ㅣ 퓨처클래식 1
시모네타 아녤로 혼비 지음, 윤병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난 가끔씩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뒷담화(?)를 즐기는 모습을 보며 뒷담화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서는 뒷담화가 인류의 공통된 특징(!)임을 깨닫게 되었다.
본격적인 책 소개에 앞서서 이 책의 전개 방식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일단 내용 전개가 상당히 재미난 편이다.
마치 최근에 읽었던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처럼 '멘눌라라'라는 인물이 주인공이지만,
죽으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뭘 한다기 보다는 타인들의 뒷담화나 회상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주인공이 직접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거니와 한 인물이 주인공을 쭉 관찰하고 있지도 않아서
멘눌라라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도 서술자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뉜다.
독자들은 멘눌라라의 주인집 식구들, 하인들, 동네 사람들, 친척들 등
다양한 사람들의 뒷담화를 통해 과연 어떤 여자였을까를 나름대로 상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의 치밀한 안내에 따라 책을 덮을 때 쯤엔 멘눌라라가 진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알게 된다.
이 책의 배경은 1960년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이다.
이탈리아도 잘 모르는 마당에 시칠리아가 어떨지는 알 수 있을리 없고, 게다가 시대도 60년대가 배경이다.
배경을 잘 알기는 쉽지 않지만,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아래부터는 소설의 줄거리를 일부 담고 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멘눌라라는 '알팔리페'라는 가문의 하녀(가정부)로 들어가 평생을 살다 죽은 여인이다.
'멘눌라라'는 '아몬드를 줍는 여자'라는 뜻으로 본명이 아닌 별명이지만, 등장인물들의 대부분이 이 별명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어릴 적 아몬드 줍는 일을 했던 것으로 묘사되는데 일을 얼마나 잘 했는지 그 일을 한 것이 평생의 별명이 된 셈이다.
우연한 기회로 알팔리페 가문에서 일을 하던 멘눌라라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중년에 이르러서는 가문의 재산관리까지 맡게 된다.
그러던 멘눌라라가 유언장에 재산 분배에 대한 언급 하나 없이 죽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알팔리페가 사람들은 멘붕에 빠진다. 그녀가 관리하던 재산에 대한 행방이 묘연해졌기 때문이다.
멘눌라라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그대로 자신의 장례식을 치뤄줄 것을 주인집 가족들에게 요구한다.
그러자 알팔리페가 사람들과 이들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멘눌라라가 어떤 이였는지를 떠들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눈에는 착실하고 일 잘하고 똑 부러지는데다 외모까지 아름다웠던 똑순이였고
누군가에게는 안하무인에 같은 하인들끼리도 무시와 막말을 일삼는데다 뒤로 재산까지 빼돌리는 악녀였다.
독자들은 책의 후반부가 될 때까지 과연 멘눌라라가 성녀인지 악녀인지 알쏭달쏭한 채로 책을 따라가게 된다.
그녀의 마지막 말대로 장례가 치뤄지지 않자, 알팔리페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급기야 죽은 멘눌라라에게 편지까지 오게 되면서 책은 후반부로 치닫는다.
죽은 사람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전반부의 몰입도는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띠지에 적힌 것처럼 '지적 유희'나 '숨 막히는 두뇌 게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반 이후부터 두뇌게임 비슷한 것을 하긴 하지만 추리물이나 스릴러물에 비하면 싱거운 편이다.
하지만 책의 중반부 이후부터 죽은 멘눌라라가 쓴 편지가 도착하고 그녀의 과거 행적들의 객관적인 사실들이 제시되면서
몰입도가 급격하게 올라간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장점은 마케팅 문구인 '지적 유희'보다는 인간과 인간관계에 관한 성찰에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상당히 편협한 정보를 가지고 타인을 판단하곤 한다.
또한 굉장히 쉽고도 즐겁게 타인의 불행과 행복을 가십거리로 삼는다.
이것은 책에서 묘사한 대로 알팔리페가 사람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무지하거나 저급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확 와닿을 예를 들어보면, 최근 두 여자 연예인의 다툼이 인터넷의 최대 이슈였던 적이 있다.
'언니, 저 마음에 안들죠?'로 시작된 그 사례에서 사람들은 초반에 아주 조그만 정보를 가지고 한 쪽을 아예 몹쓸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다 그 때의 정황이 담긴 동영상이 공개되자 이번에는 역으로 상대방을 쓰레기로 만들었다.
이 사례는 우리가 타인을 판단함에 있어서 굉장히 즉각적이고 편협한 정보에 의존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사실 일상에서도 어쩌다 주변을 잘 확인하지 못해 인사 한번만 제대로 하지 못해도 버릇없는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기 쉽상이다.
정말 밉상이었던 사람도 어쩌다 나한테 이득이 되면 갑자기 좋아보이기도 하고,
괜찮게 봤던 사람도 어쩌다 나한테 서운하게 하면 여태 사람 잘못봤다며 깎아내리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사건 당사자들과 전혀 관련없는 사람들과 이러쿵 저러쿵 논평하기를 즐긴다.
그게 사건 당사자들에게는 물론이요 자신들에게도 득이나 실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책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아주 적나라하면서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현란한 표지 문구들 중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이 문구 뿐이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일단 죽어야 한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이 책은 이 고민 하나를 던져주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맞아, 그 불쌍한 여자 이야기는 입에 못 담을 말에서부터 잔뜩 부풀린 말까지 들을 만큼 다 들었어. 더 이상 지어낼 이야기가 어디 있어? 사람들은 말만 많지 아는 건 없다고." (pg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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