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밥
이복구 지음 / 문학수첩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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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나를 찾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대한 무의미 속에 던져진다는 게 아닐까? (pg 100 - 식물의 시간)



간만에 여유를 찾은 김에 소설책 한 권을 골랐다.

책이 때마침 휴가를 낸 아침에 도착했다.

식사 후에 머리나 식힐 겸 책을 잡는다는 것이 그 날 저녁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고 모두 읽었고 결과적으로 머리는 더 뜨거워졌다.


총 6개의 짧은 이야기들이 한 권에 묶여 있다.

보통 이런 책을 읽고 나면 공통된 주제가 없어 평을 하기가 난감하게 마련인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6개의 이야기들이 상호 연관성은 없지만 작가가 이를 통해 전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을 남김에 있어서 이렇게 망설여보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주제가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래부터는 개인적인 감상이며 스토리에 대한 언급이 있을 수 있어 보는 이에 따라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밝힌다.)

 


이 책은 '삶과 죽음'을 담고 있다.

어떤 소설이든 당연히 삶과 죽음을 담고 있게 마련이지만,

이 책은 '소외'된 삶과 이를 둘러싼 '죽음'에 더 방점이 찍혀 있는 듯 하다.


이 책에서의 '소외'는 '미친 발'에서의 주인공처럼 단순히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족에게서의 소외(짖는 아이, 맨발), 심지어는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식물의 시간, 돌산)도 담고 있다.


또한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죽음을 경험했거나 주변의 누군가가 죽는 등 모두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감정들, 분노, 슬픔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아무렇지 않음'을 경험한다.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소외된 삶은 죽음과 밀접하게 닿아 있으며,

이들의 삶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죽을 것인가'하는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아래부터 나오는 푸른 글씨는 모두 원문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잘사니까 죽는 겁니다, 아주머니. 사람은 행복하면 죽고 싶답니다."

"에이, 사장님도. 그런 말이 어딨어요?"

"행복이라는 것, 손에 쥐면 그런 고독이 없거든요."

"그럼 그건 행복이 아니죠..."  (pg 96 - 식물의 시간)



다 읽고서 새삼 느끼는 바이지만, 이 6개 이야기들의 순서가 치밀하게 의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열자마자 '짖는 아이'라는 이야기에는 마치 세상 다 산 듯한 노년의 시선을 지닌 아이가 등장한다.

본래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지만 아린 아이의 몸 속에 자리한 늙은이의 시각으로 보는 세상은 더욱 추악하기만 하다.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어 자란 아이의 무서운 시각을 통해 세상을 돌아볼 무렵,

'식물의 시간'을 통해 독자는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는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이 어떻게 환멸과 허무에 빠지는지를 보게 된다. 


나를 찾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대한 무의미 속에 던져진다는 게 아닐까? (pg 100 - 식물의 시간)


그러다 '맨밥'과 '돌산'을 통해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다 인간의 가치를 잃은 사람들의 모습을 접한다.

책의 후미에 등장하는 '미친 발'과 '매직 아워'에서는 삶과 죽음을 통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당신이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소모하는 시간쯤으로 생각하는 자체에 나는 공포심을 느꼈어.

나는 시간이란 늘 현재가 중요하고,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야 하며,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한다는 생각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 (pg 263 - 매직 아워)


학수 아재는 아마 특별한 시간, 특별한 장소에만 매직아워가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몰라.

즉, 인생 그 자체가 온통 매직아워라고 말이야. (pg 295 - 매직 아워)



회사원의 삶이라는 것이 뭐 다 그렇지만 때때로 의문과 회의가 들게 마련이다.

그러던 차에 보게 된 이 소설은 상당히 무거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과연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지금 나의 모습 그대로 죽음을 맞을 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책의 뒷편 해설을 보면 작가가 본래 허무와 환멸의 정서를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해설자 역시 '이복구의 소설에서 희망의 거처는 뚜렷하지 않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희망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작가가 그 희망을 온전히 독자에게 맡겨두었다는 느낌이다.


읽어본 이복구 작가의 글은 이 책이 전부라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으나 이후에 접하게 될 다른 작품들이 상당히 기대된다.

6개의 이야기 모두 등장인물의 나이, 성별, 사회적 위치들이 달라 매 이야기마다 독특한 시각을 경험할 수 있었고,

서술 방식들도 조금씩 달라서 한 권을 다 읽으면서도 지루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문장들도 곱씹어 읽어보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도 충분한 울림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상당한 흡인력을 지닌 소설이었다.

글을 쓴지는 상당히 오래된 작가라 하는데 책으로 출간된 것이 적다는 것으로 보면 상당히 신중하게 글을 쓰는 모양이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마치 긴 꿈을 꾼 듯하다.

작가가 제시하는 또 다른 삶의 시각을 빠른 시일 내에 접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나를 찾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대한 무의미 속에 던져진다는 게 아닐까? (pg 100 - 식물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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