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겐지의 책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이후 두 번째로 접하게 되었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서평: http://blog.naver.com/qhrgkrtnsgud/10181610300 / 이하 '인생'으로
표기)
이전에 본 책의 강렬한 인상 덕분에 이번 책도 꽤 기대가 컸다.
(아래부터 나오는 푸른 글씨는 모두 원문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이전 책에서도 그는 일관되게 온전한 '자립'의 삶을 추구할 것을 강렬한 어조로 주장하고 있다.
자신을 둘러싼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삶.
야생동물들은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거나 긴장을 늦추면 천적에게 잡아 먹히게 마련이다.
저자는 그러한 야생동물의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한다.
살아남으려고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진정한 '젊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젊음'이란 단순히 나이가 어림을 뜻하지 않는다.
노인이어도 눈빛에 총기를 담고 자신의 삶을 자립적으로 사는 사람은 '젊음'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리 어려도 가축이나 다름없는 삶을 사는 자는 '젊음'을 빼앗긴 산송장이라고 말한다.
'젊음을 죽이는 적들에 대항하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을만큼 저자는 자립의 삶이 곧 젊음임을 강조한다.
그 젊음을 죽이는 적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부모와 국가 등 이전 책에서도 지적했던 부분을 이번 책에서는 더욱 실랄하게 비판한다.
자신의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엄마, 아내 등쌀에 자식에게 큰 소리 한번 못치는 아빠를 맹비난한다.
국가라는 것도 결국은 권력을 가진 소수의 것일 뿐이니 놀아나지 말라며 호통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주인의식'을 강조하지만 정작 주인은 따로 있으니 노예 생활따위 당장 집어치우라 말한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자신이다.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자신뿐이다. 그것은 철칙이다.
(pg 51)
사실 '인생'과 논조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인생'을 읽은 사람이라면 굳이 이 책은 읽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다만 문장의 어조가 '인생'보다 훨씬 강하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다소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인생'을 보고난 뒤에는 두 번도 생각 안하고 바로 별 다섯개를 찍을 수 있었는데 이 책은 다소 망설여졌다.
특히 가족의 역할을 너무 일반화시켜 말하는 듯한 부분과 여성에 대한 편견이 다소 불편함을 느끼게했다.
하긴 저자가 아래와 같이 일반 대중 전체를 염두해두고 쓴 책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기는 했다.
이런 나날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런 생활을 진정 바랐던 것은 아니다, 이런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
그런 후회가 가슴을 스칠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들면서 깊은 한숨이 나오고, 기분 전환
정도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아
오늘 저녁의 반주는 애타게 기다리면서도 내일을 적극적으로 맞이할 힘은 점차 쇠해 가는,
그런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pg 88)
사실 내 자신은 누구보다도 윗 구절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내 자신을 호되게 나무라는 책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렇게 사는 삶이 내가 원하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여실히 느꼈다.
직장인이 되기 위해서 타인을 위해 죽어라 일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건 내
인생이다,
어느 누가 되었든 개입할 수 없다, 내 일은 내가 결정하겠다, 그것이야말로 자유의 증거이다, 제 아무리 직장에 충성하고 심혈을 쏟아 분투해
본들 반드시 필요한 인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들 정년이 되면 대형 쓰레기처럼 미련없이 내던져질 뿐이다. (pg73)
어릴 적 꿈이 직장인이었다는 한심한 인간이었으니 지금 한심한 것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 꿈을 이루고 나서야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분투, 혼란, 내일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 그것이야말로 당신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능력을 일깨우고,
생각지도 못한 힘을 발휘하게 하며,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인간의 모습으로, 아 내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당신을 변모시킬 것이다. (pg 63)
난 저렇게 살 자신이 없다.
부럽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나는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나의 내일이 확실한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어중간하게 불안한 내일과 어중간하게 안정적인 내일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결국 '안정적임'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부합하려면 확실하게 안정적이지 않으면 안될테니
결국 불안하게 살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다보니 친구들 만나서 술 한잔 기울이며 예전 이야기나 실실 하는게 낙이 되어 버렸다.
생각해보면 이제 서른이 예전 이야기랄만한게 어디 있겠는가.
직장에서도 나이 50도 안 된 사람들이 나이 먹었네 하며 옛날 이야기나 실실 해대는게 짜증인데 내 자신도 그러고 있다.
중장년층이라면 몰라도, 아직은 폭발적인 젊음을 누려야 하는 청년층까지 하나같이 과거로
눈을 돌리고 나약한 치유에 젖어들려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치유를 위한 치유, 감동을 위한 감동을 밤낮으로 추구하고, 돈을
내면서까지 거짓 치유와 엉터리 감동을
얻으려 애쓰는 자신에게
조금도 의문을 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pg 161)
아직 과거를 회상할 때가 아니다.
아니, 평생 과거를 회상할 때는 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살아갈 날이 하루라도 남아 있다면 살아갈 날을 생각해야지 과거따위 회상해서 무엇하겠는가.
국가가 있어 당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가 있어 당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직장이 있어 당신이, 가정이 있어 당신이, 친구가 있어 당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바로 당신이 있어 있는 것이다. (pg 76)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생'을 보고난 후에는 '에라이 인생 뭐 있나 한번 해보는거지'싶은 뭔가 모를 패기가 생겼었는데
이 책을 보고나니 뭔가 모를 씁쓸함이 올라온다.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맥주 한잔이 너무도 생각난다.
하지만 아래 문구가 자꾸 떠올라서 한잔 하기도 뭣하다.
당신은 술을 퍼마시고 이성을 잃어버리고 싶어 할 만큼 그렇게 대단한 이성의 소유자인가.
(pg 142)
저자의 주장에 100%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들어주는 힘은 분명 있는 것 같다.
특히 사소하다면 사소한 술, 담배 등 정신을 나약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자립을 시작하라는 말은 호소력이 있었다.
지금 금연 1년째인데 술은 도무지 끊을수가 없다.
물론 사회생활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술이 너무도 좋다.
없으면 정말 하루하루를 못견딜 것 같다.
담배 없는 삶이 익숙해졌으니 이제 술 없이 사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할텐데 큰일이다.
오늘 밤에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남긴 인류에 대한 생각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인간의 기괴함이 재미있고, 인간이 야생동물의 한 종류치고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어
거기에서 쉴 새 없이 생명의 불꽃이 피어오른다는 점이다.
인간이 추악한 만큼 그 불꽃은 아름답니다. (pg 233)
언젠가는 나에게도 인간 세상이 재밌다고 느낄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