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의 짧은 체류
스티븐 L. 펙 지음, 김항나 옮김 / 자음과모음 / 202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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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160페이지 정도로 제목처럼 정말 짧은 이야기지만 독자들을 엄청난 실존적 공포로 몰아넣는다는 책 소개에 강렬하게 이끌렸다.

서사가 짧으면 대체로 기억에 남는 강도도 적게 마련인데, 어떤 내용이길래 그렇게 짧은 분량 안에서도 충분한 공포감을 선사할 수 있는지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작품의 내용은 일면 간단하다.

한 남자가 지옥에 떨어져 겪은 일들을 다루고 있는데, 제목이 반어법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작품 속 지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던 지옥과는 매우 다르다.

일단 물리적인 공간부터 악마들이 채찍을 들고 유황불이 떨어지는 곳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큰 도서관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

원하는 음식은 키오스크에 말하기만 하면 언제든 제공되고, 의복도 매일 새로 지급되며 일정한 시간에 잠들어 일정한 시간에 깨어난다.

그리고 본인이나 타인이 일부러 가하지 않는다면 신체적인 고통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전날 죽음에 이른다 하더라도 다음날이면 다시 눈을 뜰 수 있다.

이렇게만 보면 작품의 무대가 무슨 지옥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거대한 도서관에서의 삶이 왜 지옥인지를 한 장 한 장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실감하게 된다.

이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의 임무는 딱 하나다.

그 거대한 도서관에서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책을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는 이 도서관에는 일정한 분량 안에서 쓸 수 있는 모든 책이 존재한다.

저자가 계산한 바로는 95의 1,312,000제곱에 달하는 책이 있는 것이라 한다.

워낙 큰 숫자라 실감이 나지 않을 텐데, 이 우주에 존재하는 전자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수라고만 이해하면 된다.

즉,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서관은 유한하다.

하지만 그 유한함이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무한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따라서 이곳이 지옥인 단 하나의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한에 가까운 권태로움 속에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는 점에 있다.

존재보다 더 깊은 절망이 있다. 그것은 의식의 골수와 영혼의 자리까지 스며든다.

나는 영원히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지옥에서 어떻게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다른 선택은 없었다. 이곳에서 존재는 끝없이 이어진다.

유한이라 해도 그것이 무한과 아무런 현실적 차이를 느낄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pg 153)

모든 층이 똑같이 생긴 데다 만나는 사람들마저 미국에서 특정한 시기에 사망한 백인에 한정되어 있다.

사망자들의 인종적, 문화적 백그라운드마저 비슷하니 그들이 모여봤자 새로운 자극이랄 것이 금세 바닥나버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작게 무리를 지어 일정한 사회를 이뤄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이성과 교제를 하기도 하며 대학을 만드는 무리도, 사이비 종교를 만드는 무리도 생겨나지만 결국 무한에 가까운 시간 앞에서는 모두 허망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무작위로 배열된 책들을 매 순간 수없이 들추면서 어쩌다 발견하는 '말이 되는 문장'을 찾는 정도의 희열이 그 지옥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 되고 만다.

당신이 믿어왔던 것을 지탱하던 모든 구조가 허구였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그 믿음은 어디로 가는 걸까?

우주적 질서도, 정언명령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pg 81)

결국 이 장소의 가장 잔인한 지점도 여기에 있다.

지루함을 견디기보다는 전기 충격 버튼을 누르고 만다는 심리학 실험도 있듯이 인간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무료함인데 이 무료함을 무한에 가까운 시간 동안 경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한하지 않다'라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유한함이 인간의 상상력을 한참 벗어나는 것일 때, 인간은 실낱같은 희망조차도 품을 수 없게 된다.

기대는 선물과도 같다. 어쩌면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지도 모른다.

기대는 희망에서 태어난다. 실로 그것은 희망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다.

그러나 그 희망을 잃을 때 찾아오는 것은 가장 깊은 절망이다.

(pg 160)

정말 명성 그대로 소름이 돋는 작품이었다.

읽으면서 저자의 상상력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아왔지만, 정말로 지옥이 이와 같다면 지금부터라도 조로아스터교를 믿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로아스터교의 신들이 진짜 신이라는 설정이 있는데, 물론 저자가 블랙코미디로 만든 장치일 것이라 생각한다.)

두께에 비해 책값이 살짝 비싼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장담하건대 읽어보면 한없이 빠져들게 될 것이다.

특이하게도 저자의 본업이 진화심리학자이자 대학교수이기도 해서 발표한 소설이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모쪼록 이 책이 잘 팔려서 다른 작품들도 국내에 출시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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