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과 영혼 워프 시리즈 1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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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의 스팸 문자를 언젠가부터는 제대로 읽지도 않고 지우는데, 며칠 전 도착한 문자 속에 찍힌 저자의 이름 네 글자는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했다.

제목이 무슨 뜻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결재 버튼을 누르고 만 것이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바쁜 주간임에도 도착하자마자 읽기 시작했고 이어지는 술자리와 숙취 속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단편으로 유명한 저자답게 이번 책 역시 단편집으로 총 아홉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보통 단편집의 경우 인상적이었던 몇 작품만을 소개하는데, 이 책은 정말 한 작품도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첫 포문을 여는 작품부터 인상적이다.

'크리스털의 밤'이라는 작품으로, 작품 속에서는 크리스털이라는 장치를 통해 가상의 생명체가 그 기원부터 고등한 지능을 갖게 될 때까지 진화시키려 하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즉, 지구와 비슷한 행성 하나를 시뮬레이션 해 진화 속도를 매우 빠르게 돌리면서 그가 그들의 신이라는 점을 인식 시킨다면, 그들이 인류의 지성을 뛰어넘게 되는 순간이 올 때 현재 인류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탄생시킨 생명이 인간을 닮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고, 결국 우리 자신이 풀어야 할 문제를 AI와 같은 또 다른 존재가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인류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었다.

굉장히 하드한 SF 작품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짧지만 굉장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신혼여행으로 떠난 달에서 홀로 살아남아 지구로 떠나야 하는 여정을 담은 작품으로, 거대한 슬링샷이라 할 수 있는 '스카이훅'이라는 장치가 중요하게 소개된다.

서사 자체가 아주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스카이훅이라는 소재는 다른 SF 작품에서도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어지는 '너 혼자서?'라는 작품에는 일론 머스크의 숙원 사업 중 하나인 '뉴럴링크' 개념이 등장한다.

뉴럴링크를 통해 서로의 경험을 100% 공유할 수 있는 네쌍둥이의 이야기다.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결국 경험의 축적일 텐데, 엄연히 다른 개체들이 기억을 공유한다고 해도 진정한 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까지 같을 수는 없음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저자가 보통 하드한 소재를 좋아하기 때문에 귀여운 고양이가 등장하는 '꿈 공장'이라는 작품은 그중에서도 특히 돋보인다.

고양이에게 칩을 심어 뇌파를 조종함으로써 고양이의 본성을 제어하는 기술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고양이가 진짜 고양이로 살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한 IT 학생의 반란 이야기다.

반려동물이라는 친근한 소재로 꽤나 하드한 상상력을 펼쳐내고 있는 작품이기에 이 책에서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 중 하나였다.

이 책은 물론 저자가 쓴 모든 작품들 중에서 가장 시니컬한 작품이라 생각했던 '크라이시스 액터스'도 다른 의미로 기억에 남는다.

기후 위기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한 사람이 진짜 기후 위기로 인한 재난 지역에 급파되어 사람들을 돕는 이야기로, 가짜 뉴스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자신의 정보 버블 속에서 헤어나기 어려운지를 제대로 꼬집어내고 있다.

중후반에 수록된 '미토콘드리아 이브'에서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의 기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성별, 종교 간 갈등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어 '내가 행복한 이유'에 수록되었던 '루미너스'라는 작품의 후속적인 '암흑 정수', 비슷한 사상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기묘한 세상에서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방랑자의 궤도'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표제작인 '잠과 영혼'이 가장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다.

잠이라는 개념이 동물에게나 존재한다며 인간이 잠들면 의식이 끊어져 영혼이 죽은 것과 같으므로 바로 묻어버리는(!) 성격 급한 평행우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잠들었다 무덤에서 살아나온 사람이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후미에 수록된 저자의 말에서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몸 역시 매 순간 같은 정보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불완전한 시스템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수록된 모든 작품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간단하게라도 줄거리를 기록해두고 싶었다.

어차피 저자의 작품에 대한 감상은 그저 '놀랍고 재미있다'로 압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워프 시리즈를 믿고 읽는 시리즈라 인식하게 된 시작점도 결국 '그렉 이건'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재확인할 수 있었다.

발매 예정 목록에 저자의 이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책을 덮어도 매우 안심이 된다.

발매 텀이 긴 시리즈지만, 덕분에 많은 저자와 작품을 만나고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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