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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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도서관 대출

굵직한 작품을 여럿 발표한 작가인데 이제서야 만나보게 되었다.

여러 작품 중 가장 최근작부터 읽어보자 싶어 골랐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마인드 업로딩이다.

말 그대로 정신은 '롤라'라고 불리는 가상 세계로 옮기고 몸은 처분하는데, 업로딩할 때의 기억과 신체 정보도 그대로 업로딩 되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서 결핍을 찾아볼 수 없는 세계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삶을 대신 살아보고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인 '경주'와 '해상', 두 사람은 롤라 속에서 만나게 된다.

중반부까지 그들이 롤라에 오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를 다루고, 후반부에 가면 롤라에 오고 난 뒤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데, 전체적인 비중은 롤라에 오기 전이 더 크다.

따라서 마인드 업로딩이라는 SF적인 소재를 다루고는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팍팍한 삶 속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투쟁이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경주는 어릴 때부터 가난 속에서 자랐고 하나뿐인 동생이 폐인처럼 지내자 내쫓아버리는데, 결국 동생이 주검으로 돌아오고 만 상처를 안고 있다.

해상은 좋은 집안에서 공부하며 자랐지만 유전적으로 루게릭 병을 앓아 일찍 삶을 마감할 처지에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의 과거는 '제이'라는 인물을 통해 한 점으로 엮이게 된다.

작품을 꿰뚫는 감정적인 측면은 역경으로 인한 체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람이 너무도 큰 시련을 만나면 다 포기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그 시점을 버텨내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또 인간이다.

작품 속에서 인물들의 심경도 이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살려는 마음이 사라지면 평화가 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화, 아무 생각도 없는 평화, 아무 감정도 일지 않는 평화.

(pg 45)

견디고 맞서고 이겨내려는 욕망이었다. 나는 이 욕망에 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스스로 봉인을 풀고 깨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어떠한 운명의 설계로도 변질시킬 수 없는 항구적 기질이라는 점에서.

(pg 519)

작품 속 롤라는 결국 도피처에 지나지 않는다.

기후 위기로 인해 빙하기가 오고 있다는 것이 작품 내내 설명되고, 후반부에 가면 지구상 생물이 사실상 멸종 단계에 이르렀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닥쳐올 위기에서 인류의 정신이라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 곧 롤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결핍이 없는 이상향이라 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감정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결핍의 부재는 곧 삶을 이어갈 이유의 부재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또한 아무리 애써도 과거는 변하지 않으며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 다시 체험해낸다 해도 그것이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결국 과거가 주는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고통이 곧 삶의 의미를 찾을 길이며, 이를 이겨내고 기어이 살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저자는 곧 야성이라 불렀다.

작품 속 인물들은 끝이라는 개념이 없는 세상에서 그 야성을 다시금 깨워낸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통제 가능한 롤라 속에서 굳이 무작위가 주는 불확실성을 택하게 된다.

억겁을 살아도, 모든 것이 가능한 천국에서 살아간다 해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고통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감정적 존재였다.

(pg 388)

페이지터너로 유명한 저자의 작품답게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감 있는 책임에도 어려움 없이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다.

SF 소재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현재의 삶과 그리 동떨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마인드 업로딩을 통한 미래 전망,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스릴, 가슴 시린 사랑이라는 어울릴 법하지 않은 요소들을 한 작품 속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인상 깊은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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