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 책의 출처: 구입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인데 단편집 말고는 아직 읽어본 적이 없었다가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저자의 책이 쭉 나열된 것을 보고 충동적으로 사게 된 책이다.

저자의 장편을 처음 접했는데, 어떻게 유명세를 얻을 수 있었는지를 제대로 느껴보게 되었다.

일단 소재가 굉장히 자극적이다.

작품은 물려받은 유산으로 돈 걱정 없이 영세 규모의 출판사를 운영하는 남성인 '빅터'의 이야기다.

이렇게 아무런 고민이 없을듯한 그는 매력적인 아내를 얻게 되는데, 문제는 아내가 다른 남자들에도 지나치게 매력적이라는 점이었다.

둘 사이에 아이도 하나 있었지만 가정에 얽매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 그의 아내는 상습적으로 다른 남자를 찾는다.

작은 마을이지만 그 마을을 찾는 외지인은 일단 건드리고 보니 그리 길지 않은 작품인데도 바람의 대상이 되는 남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빅터의 반응이다.

어차피 그녀의 관심이 지속적이지 않으니 그러다 말겠지 싶어 그냥 놔두는 것이다.

심지어 아이가 있는 집에 내연남을 자주 부르는데, 그는 속으로는 불만이어도 예의를 갖추어 일반적인 손님처럼 대접한다. (참아, 내 안의 유교 드래곤)

물론 눈치를 주기는 하지만, 그의 아내가 그 앞에서도 애정 행각을 숨길 생각이 없으니 남자들도 별 거리낌이 없다.

이렇게 그녀의 불륜 행각이 워낙 대범했고, 작은 마을이다 보니 그러한 행동들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당연히 이웃 사람들도 그에게 이런저런 안 좋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자 그는 질투심보다는 자신의 사회적 위신이 깎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보통을 이런 경우 아내를 탓할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다가오는 남성들을 적대시하기 시작한다.

그녀를 만나는 남자들 입장에서는 예쁜 여자가 먼저 다가오는데 내가 책임질 일도 없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그는 아이까지 내팽개치고 다른 남자를 찾으며 점점 대범해지는 아내와 굳이 이혼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잔잔히 열을 가하는 물도 언젠가는 끓어오르듯, 작품 중반쯤 결국 그는 아내의 내연남 중 하나를 익사시키고 만다.

작은 마을에서 그가 쌓아놓은 사회적 위신이 높아 사고로 위장되지만, 문제의 본질인 그의 아내는 그대로 남아있다.

남편이 내연남을 살해했음을 직감한 아내는 아예 또 다른 남자와 떠나버릴 생각까지 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작품의 중후반쯤까지의 이야기다.

솔직히 이 부분까지는 읽으면서 짜증이 엄청났다.

개인적으로는 문제의 원인인 아내를 두고 왜 자꾸 다른 곳을 해결(?) 하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 소개에 보면 이 작품이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고 하는데, 내가 빅터만큼 미친 것은 아니라 공감이 안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후반을 지나면 사건들이 몰아치면서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지는 결말을 맞게 된다.

결말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맞나 싶을지 모르겠으나, 내 감상이 그렇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그대로 적었다.

특히 빅터의 최후를 묘사한 표현들은 말 그대로 소름이 돋았다.

파멸적인 이야기에 걸맞은 완벽하게 파멸적인 엔딩이었다.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윌슨을 보자 그런 유형이 세상 사람들의 절반을 차지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개가 없는 추한 새들. 영원히 평범할 평범한 사람들. 그걸 위해 싸우고 죽어가는 사람들. 빅터는 윌슨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세상은 나 덕분에 돌아간다는 음울하고 회한에 찬 윌슨의 얼굴 뒤에는

보잘것없고 멍청한 생각뿐이었다.

빅터는 그의 얼굴과 그 얼굴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저주했다.

아무 말도 없이 미소를 지으며, 남은 온 힘을 다해 저주했다.

(pg 314)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성향을 가진 자와 그 성향을 굳이 건드려 터뜨려야 속이 시원한 자가 만났을 때 벌어질 수 있는 파멸적인 결과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곁다리 감상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보는 나는 굉장히 파편적인 정보로 구성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아직 책꽂이에 저자의 책이 두 권 더 남아있고, 대표작인 리플리 시리즈는 시작도 못했다.

저자의 작품 세계에 빠져들 기회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기쁘게 다음 책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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