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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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도서관 대출

발간과 동시에 서점과 도서관 인기 순위 상위권에 올라있고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SF 장르라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다만 간과한 것은 이 책이 휴고 상이나 필립 K. 딕 상이 아닌 부커 상 수상작이라는 점이었다.

우리가 SF 장르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과학적인 상상력이나 기발한 사건, 기상천외한 전개를 찾아보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물론 이 책도 과학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이 SF 영화라기보단 과학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고 보면 되겠다.

작품은 지구 궤도를 도는 우주정거장에서 일하는 우주비행사 여섯 명의 삶을 다루고 있다.

출신 국가도, 성별도, 종교적 성향도 각기 다른 여섯 명이 아홉 달 동안 같은 공간에 갇혀 지구를 관측하고 시설을 개보수하며 실험동물을 돌보는 등 각자가 담당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보통의 소설이라면 이런 배경에서 구성원 간 다툼이 발생한다거나, 우주정거장에 미상의 파편이 튀어 비상 상황에 처해진다거나, 생존에 필수적인 무언가가 갑자기 결핍되는 등의 상황이 벌어지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우주비행사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업무 수행만을 다루고 있다.

책 속 문장 중 작품을 잘 표현한 것 같은 구절이 있어서 옮겨본다.

이곳에서 작은 일들은 너무 시시하고 나머지는 너무 경이로워서 중간이 없는 듯하다.

일상적인 가십도, 그 남자가 그랬다더라, 그 여자가 그랬다더라는 뒷이야기도,

우여곡절도, 이곳에는 없다.

그저 아주 여러 번의 선회가, 어디로도 가지 않으면서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아주 많은 고찰만이 있다.

(pg 35)

그럼 이 작품의 재미 요소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일단은 지구와 다른 환경에 놓인 그들의 처지 그 자체가 있을 수 있겠다.

출근, 근무, 퇴근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고, 상대의 몸에서 나온 이산화탄소마저 재활용해 내가 호흡할 때 써야만 하는 공간에서 무려 아홉 달을 생활해야 한다.

게다가 중력이 약해 갈수록 몸이 약해지며 24시간 안에 지구를 16바퀴나 돌아야 하니 낮과 밤도 수시로 바뀌기에 태양의 존재를 기준으로 생활하던 생체 시계도 모두 고장이 난다.

지상으로부터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거대한 태풍의 성장을 관찰하지만 그 태풍에 휩쓸려갈지 모르는 어느 어부 가족을 막연하게 떠올리며 무사하기를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수없이 지구를 돌며 저 아래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지만 너무 빨리, 너무 멀리서 지켜만 봐야 한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서로의 존재는 가족 그 이상으로 변하게 된다.

공통점이 극히 드문 개인들이지만 좋든 싫든 그 사람의 타액이 곧 내 타액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공간에서 함께 먹고 같은 영화를 보다 같이 잠드는 생활을 하다 보면 대화로 나누는 것 이상으로 서로에게 동화되기 마련인가 보다.

작품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 지구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다.

거대하고도 아름답고 한순간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이 행성, 태초부터 우리를 품어왔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구석구석을 갉아먹고 있는 바로 이 행성 말이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실로 놀라운 힘이 지구를 형성한다. 그 힘이 모든 걸 바꿨다.

숲, 극지방, 저수지, 빙하, 강, 바다, 산, 해안선, 하늘을.

욕망에 따라 윤곽이 그려지고 조경된 행성을.

(pg 132)

이 작품이 재미있었느냐 물으면 단연코 그렇지는 않았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던 건 저자의 멋진 표현과 이를 충실하게 국문으로 옮겨낸 번역가의 공이라 생각한다.

생전에 우주라는 공간에 가 볼 일이 없는 일반인들도 저자의 문장을 충실하게 상상으로 옮겨낼 수 있다면 우주에서의 생활과 그 공간에서 보는 지구의 모습을 꽤나 상세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그간 읽어왔던 작품들과 궤가 달랐지만 좋은 경험이 되었다.

분량이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꽤 호흡을 길게 읽어야 할 것 같아 추운 겨울날 느긋한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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