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 지음 / 래빗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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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도서관 대출

본래 SF 작품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모든 SF 작가들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처음에는 인기가 많다니까 접했고 별 감흥 없이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몇 권 읽다 보니 이제는 저자의 작품을 찾아서 읽을 정도로 스며들게 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장편보다 단편에서 더 빛을 발하는 작가라 생각하는데, 이 작품 역시 총 일곱 작품이 수록된 단편집이다.

시작을 여는 '수브다니의 여름휴가'는 SF 불멸의 소재인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 속 안드로이드만의 특징이라면 누구도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되었음에도 다시 기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기계지만 사람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자신의 삶(?)을 꾸려가던 안드로이드가 사람에게 치이다 못해 자신에게 가장 걸맞은 은퇴를 고민한다는 콘셉트가 재미있었다.

두 번째 작품이 표제작인 '양면의 조개껍데기'다.

성간 여행이 가능해진 시기, 인류의 아종들이 여러 행성에서 나타나 공존하고 있는 미래를 그리고 있는데 그중 한 종이 태어날 때부터 한 뇌 안에 두 가지 이상의 인격이 병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작품에는 여성이지만 남성인 자아가 하나 더 있는 '샐리'가 등장한다.

두 자아가 한 몸을 공유하며 함께 일하고 함께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다.

표제작 다운 독특한 상상력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자아의 성적 지향도 아예 달랐다면 더 재미있는 갈등 양상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느껴졌다.

진동 언어를 사용하는 외계인을 분석하는 작품인 '진동새와 손편지'를 지나면 본 책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 중 하나인 '소금물 주파수'라는 작품이 등장한다.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이라는 살짝 식상한 뻔한 소재에 기계와 환경의 조화라는 새로운 소재를 조합해 독특하면서도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인간의 생애 주기에 비하면 기계의 생애 주기는 매우 길고, 자연의 주기는 그보다 더욱 길다는 점에 착안하여 시간차가 가져오는 만남과 이별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고요한 소란'에서는 청각이라는 인간의 감각이 어떤 미지의 힘에 의해 일정 기간 영향을 받은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독특한 소재였지만 서사적으로 특별한 감상은 없었던 이 작품을 지나면 꽤나 흥미로웠던 두 작품이 연달아 등장하며 책이 마무리된다.

'달고 미지근한 슬픔'은 양자컴퓨터 속 시뮬레이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마인드 업로딩의 결과물인 듯한 인물들이 큐비트로 이루어진 양자컴퓨터 속에서 '살아있다'라는 감정을 찾기 위해 연구 활동을 펼친다는 내용이다.

비전공자인 우리가 교양서들을 통해 접하는 양자역학의 세계가 직관적이기보다는 관념적으로 느껴지듯이, 양자로 이루어진 존재들이 거시적인 실체를 가진 우리를 이해하려 한다면 마찬가지로 꽤나 관념적으로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꽤나 흥미롭게 읽었다.

마지막 작품인 '비구름을 따라서'는 SF에서 자주 다루는 멀티버스를 소재로 한 작품인데, 특이하게도 멀티버스가 존재하기는 하나, 각각의 세상에서 없어져도 하등 상관없는 물건들만 어쩌다 한 번씩 다른 세계로 튕겨져 나온다는 설정을 채용하고 있다.

마치 모든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다가 관측하면 상태가 하나로 고정되는 양자처럼, 아무도 몰라서 모든 세계에 중첩되어 있을 수 있는 물건들만 어쩌다 한 세계로 톡 튀어나와 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는 매 순간 너무 많은 것과 상호작용하고,

그래서 너무 많은 것을 상처 입히는 존재라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움직임마다 이 세계 전체가 몸에 감겨든다고.

누구도 원해서 태어나지는 않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이 세계에 연루되기 시작한다고.

돌멩이처럼 사소해지면 건너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애초에 돌멩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pg 358, '비구름을 따라서' 中)

현실이 힘들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다른 세계가 있다면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는 공상에 빠져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설정한 멀티버스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세계와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멀티버스가 몇 개가 존재하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나는 이 세계에 밖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참으로 SF스럽게 전달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어떤 낯선 생각은 품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pg 333, '비구름을 따라서' 中)

수록된 모든 작품이 재미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지만, 저자의 상상력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이번 작품 역시 재미나게 읽었다.

강박적으로 여성 인물만을 고집했던 초기의 모습도 이제는 꽤 사라진 것 같아서 이야기의 흐름도 많이 매끄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아직 젊은 작가라서 앞으로도 얼마나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줄지 앞으로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음 작품을 기다려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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