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 0 : 구상섬전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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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화가 되면서 대한민국에도 열풍이 일었던 '삼체'의 프리퀄로 알려진 작품이다.

한국에 정식 발간이 되지 않았던 작품인데 이번에 북펀딩을 진행하면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삼체'는 작년 한 해 읽었던 모든 책 중에 베스트로 꼽는 작품이었던 터라 이 작품의 프리퀄이라고 하니 궁금해서 잠이 안 올 정도였다.

제목인 '구상섬전'은 영어로 'ball lightning'이라는 현상을 뜻한다.

단어 그대로 번개가 구형의 형태로 관찰되는 자연현상인데, 굉장히 드물게 발생하는 현상이라 아직까지 발생 원인도 구체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구상번개'라고 번역하는 것 같은데, 원문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저자가 쓴 단어를 유지했다고 하며 개인적으로도 구상번개보다는 좀 더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제목이라 마음에 든다.

작품은 한 소년이 구상섬전으로 부모를 잃으면서 시작된다.

특이하게도 이 현상은 선택적으로 영향을 준다.

예를 들면, 책장 속 책은 재가 되는데 책장은 멀쩡하다던가, 장갑은 멀쩡한데 장갑을 낀 손의 손톱이 타서 없어지는 등 마치 의식이 있는 것처럼 선택적으로 무언가를 태워버리는 강력한 위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정말로 죽은 게 아니에요.

그들은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불확정성 속에

생과 사, 두 가지 상태에 동시에 놓여 있어요.

(pg 316-317)

갑작스럽게 부모를 잃은 소년은 학자가 되어 구상섬전을 추적하려 한다.

초중반까지는 이 현상의 막강한 위력을 알게 된 군부와도 협력하여 수학, 물리학, 기상학 등 여러 학문적 접근을 통해 이 현상의 비밀을 밝혀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군인이자 공학자(이자 무기에 미친 자)인 '린윈'이라는 여성과 긴밀하게 협력하게 된다.

후반부에서 이 현상의 정체가 밝혀질 무렵 이 현상의 물리적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삼체' 시리즈에서도 활약한 바 있는 천재 물리학자 '딩이'가 등장한다.

'삼체'시리즈가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기존의 우리가 가진 물리학적 지식을 활용해 이 현상을 대범하게 설명한다.

구상섬전의 근본은 곧 거대한 전자고, 번개는 그저 이 전자가 우리 세계와 반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이 거대한 전자에 대응하는 원자핵도 존재하는데, 이 원자핵이 곧 작품의 결말을 가져다준다.

자연 속의 모든 힘, 사람들이 가장 부드럽고 무해하다고 생각하는 힘조차도

생명을 살상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단다. - 중략 -

그 무시무시한 것들이 언젠가 네 동포와 가족의 무리 위에 떨어질 수 있고,

네 품에 안긴 아기의 연약한 피부에 닿을 수 있어.

그런 일을 막는 최고의 방법은 적이나 잠재적인 적보다 먼저 그걸 만들어 내는 거야!

(pg 438-439)

'삼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과 '삼체'의 연관성이 가장 궁금할 텐데, 개인적으로는 '딩이'가 나온다는 점을 제외하면 연관성이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꽤나 후반에 등장한다.)

'삼체' 1권 후반부에 '딩이'가 '린원'이 어린이들과 찍은 사진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사진이 어떻게 찍히게 되었는지가 이 작품에서 밝혀진다.

또한 구상섬전 무기는 양자적 특성을 띄기 때문에 실험 중에 관측자의 존재 여부가 실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데, 아무리 관찰자를 배제해도 누군가 계속 관찰한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오는 현상이 발견된다.

이를 통해 지구 밖에서 우리를 관찰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되는 정도로 '삼체' 세계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만약 정말로 우리 세계를 관측하는 초월적 관측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면

인류의 행동은 훨씬 더 신중해질 겁니다...

비유하자면 인류 사회 전체도 불확정적인 양자 상태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렇지만 그런 초월적 관측자가 있다면 인류 사회를 다시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상태로 '붕괴'시킬 수 있을 겁니다.

(pg 449)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작품 자체로서의 재미도 훌륭한 편이다.

자연현상을 과감하면서도 독창적으로 풀어낸 것도 그렇고, 자연현상을 순수하게 알고자 하는 자와 이를 어떻게든 무기화함으로써 연구비를 따내고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자 하는 자들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굳이 외계인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같은 행성에 사는 우리들도 사상이 다르면 서로를 외계인 보듯 한다는 단순하지만 자명한 진리를 이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의 물리학자들도 원자 에너지를 방출하는 공식과 기술을

엔지니어와 군인들에게 넘겨주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슬픈 표정을 지었죠. 얼마나 위선적이에요?

사실, 그들은 처음부터 그걸 보고 싶었던 거예요.

자신들이 발견한 힘이 어떻게 발휘되는지 보고 싶었던 거죠.

그건 그들의 본성이고, 또 우리의 본성일 수도 있어요.

(pg 392-393)

초중반까지 구상섬전의 정체를 알아내는 여정이 살짝 길고 막상 결말은 다소 후다닥 끝난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현상을 다루는 과정이 그리 가볍지 않아서 좋았다.

또 그 안에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다는 점, 과학의 발달이 가져다준 무기가 어떻게 우리를 향하게 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삼체'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 다시 류츠신의 작품 세계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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