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지음, 장하나 옮김 / 성림원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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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이름은 알았어도 저작은 읽어보지 못했다가 최근에서야 대표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하 '고양이')를 읽고 푹 빠졌었는데, 저자의 다른 작품이 새로운 판본으로 출시되어 읽어보게 되었다.

발표된 연도는 '고양이' 이후 바로 다음 해인 1906년으로 약 120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다.

작품의 화자는 집에 하인이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는 유복한 가정의 차남이었다.

그래서 제목인 '도련님'도 집안의 하인이었던 노부인이 화자를 어릴 적부터 부르던 호칭이다.

사고뭉치였던 탓에 혼나기 일쑤였고 아버지가 형을 편애해 가정에서는 안정을 찾지 못했던 그에게 도련님이라는 호칭과 함께 늘 따뜻하고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기요'의 존재는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그는 기요를 친할머니 혹은 제2의 어머니처럼 여기며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애정의 상징이었던 그 호칭이 성장 후에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학업을 마치고 고향인 도쿄를 떠나 한 시골마을의 수학교사로 가게 된 그는 사람들이 그 호칭을 '도시에서 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놈'과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풍족했지만 정서적인 지지를 충분히 받지 못했던 탓에 그에게는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인정의 욕구가 남아 있다.

반면에 자존심 강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는 피해를 보더라도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당찬 면모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상반되는 특질을 동시에 지니게 마련이지만, 이 작품 속 화자는 조금 더 특이하다.

나쁘게 말하면 부잣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 사회성이 떨어진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좋게 보자면 사회가 정한 관행이 자신의 신념이나 원칙에 반할 때 두려움 없이 나서는 강단 있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하간 처음 부임한 교사면서도 교장이 이런저런 조언을 하니 대뜸 이런 말을 던질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래도 교장 선생님 말씀대로 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 임명장은 돌려드리겠습니다."

(pg 27)

그 밖에도 여러 당돌한 행동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저 대사의 임팩트가 너무 강했다.

평생을 내 몸뚱어리 이외에는 기댈 구석 없이 살아와서 그런지 직장인 생활 15년이 넘은 지금, 아무리 과거를 돌이켜보아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순간이 내 삶에 단 한순간이라도 있었을까 싶다.

여하간 그가 도착한 중학교는 교사도 몇 명 되지 않는 작은 곳임에도 고여있는 인간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모순들을 그대로 품고 있다.

착한 척, 친절한 척 가면을 쓴 늑대가 사실 가장 위험한 녀석이었고, 정직하거나 물러터진 사람들은 이리저리 이용당하다 가치가 없어지면 단칼에 베어지고 만다.

선생이란 모름지기 고결한 취미를 가져야 한다던 자가 수시로 게이샤 업소를 들락거리며 이미 임자가 있던 동네 미녀도 꼬셔내고 자신의 연적은 아예 깡촌으로 보내버리는 등 어지간한 빌런도 한 작품에서 다 하기 힘든 업적들을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연이어 성공해 낸다.

피해자들은 눈물을 삼키며 고향을 떠나거나 교활한 술수에 휘말려 스스로 사표를 내고 만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그가 느끼는 환멸이 작품의 주요 내용이라고 보면 되겠다.

사람들은 가끔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보면,

도련님이니 애송이니 하며 트집 잡고 깔본다.

그럴 거면 애당초 초등학교나 중학교 윤리 시간에 거짓말하지 마라, 정직하게 살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다.

차라리 학교에서 대놓고 거짓말하는 법이나 남을 믿지 않는 요령,

사람을 속이는 방법 같은 걸 가르치는 쪽이 세상을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나을 것이다.

빨간 셔츠가 호호호호 웃은 건 내 단순함을 비웃은 것이다.

단순함이나 진솔함이 비웃음거리가 되는 세상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pg 74)

전반적으로 '고양이'와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진 작품이었다.

꼴에 먹물 좀 들었다고 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위선과 담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피해를 받는 현실은 작품이 발표된 지 1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후반부에 약간의 카타르시스가 있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웃는 자는 술수에 능한 자다.

묵묵히 일하던 패자의 결말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선을 가르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선한 사람은 바보가 되는 인간 사회의 모순을 이 작품에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분량에 압도되어 대표작인 '고양이'에 손이 가지 않았다면 이 작품으로 저자의 작품에 입문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얇은 분량에 재미도 있고 저자의 문제의식도 비슷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고양이'가 훨씬 재미있었다.)

대표작 이외에도 이미 국내에 소개된 작품들이 많지만, 아무래도 디자인이나 폰트 측면에서 새로운 판본이 읽기에 더 좋기 때문에 새로운 판본이 나오면 족족 읽어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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