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작품이지만 이 작품을 통해 현대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이 사람들에게 씌워놓는 필터 버블을 설명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같은 작품을 읽고서도 감상은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이 문학이 갖는 힘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눈먼 자들의 시각에서 변론해 보고 싶다.
물론 그들도 처음에는 '누네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두 번의 시도 끝에 곧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결론지어버린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들이 '누네즈'를 이해하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를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큰 위험이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모든 후손들의 눈이 멀게 되었다는 설정이었는데, 만약에 '누네즈'가 사회에 섞이면서 그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아이들이 태어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후천적으로 시력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유전자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보이는 걸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없기에 보이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은 극심한 갈등을 빚게 될 가능성이 크다.
보이는 자들이 소수일 때는 박해받는 소수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런 현상이 몇 세대만 거치고 나면 '누네즈' 이전에는 평화롭게 잘 살고 있던 나라가 결국 서로 다른 이념의 국가로 갈라서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눈먼 자들의 멸종으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들 입장에서 '누네즈'는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서로의 작은 차이도 민감하게 포착해 기어이 구분 짓는(차별하는) 능력이 곧 인간이 진화해온 방향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두 무리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은 현실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클 것이라 생각한다.
길이가 짧지만 여러 보충 텍스트들이 있어서 읽는 시간보다 혼자 생각해 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간만에 수행평가를 하는 학생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서 재미있었던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저자의 작품들이 워낙 오래되었고, 시중에 나온 판본들도 다 옛날 판본들이어서 쉽게 손이 가지 않았었는데 이번 작품을 계기로 다른 작품들도 신선한 해석들을 덧붙여 발매되면 훨씬 더 접근성이 좋아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