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파괴자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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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추리소설 같은 제목이지만 원제는 '가스라이트 효과'로 우리가 흔히 '가스라이팅'이라고 부르는 용어를 학문적으로 처음 정립한 책이다.

이제는 언론에서도 자주 쓰는 용어라 일반인들도 가스라이팅이라고 하면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아는 것 같은데, 이 용어가 정확히 무슨 현상을 의미하고 또 어떻게 하면 살면서 그런 사람들을 피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가스라이팅은 자신이 항상 옳다고 여기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현실감을 좌우하는 현상을 말한다.

즉, 가해자는 피해자를 어떤 방식으로든 '판단'하며 피해자는 가해자의 판단이 (실제로는 그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참모습이라고 믿게 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

저자가 초반부터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 중 하나는, 가스라이팅이 곧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호작용으로만 발생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를 '가스라이팅 탱고'라고 부르고 있는데, 마치 탱고처럼 가해자가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려고 할 때 피해자가 여기에 장단을 맞춰주지 않으면 결코 심각한 상황으로 번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물론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가해자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겠지만 피해자 역시 자신이 가스라이팅에 취약하지 않은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가스라이팅을 받기 쉬운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실제로 매우 강하고 똑똑하고 유능하더라도,

이상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한다.

가해자의 인정이 없이는 자신을 훌륭하고 능력 있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pg 79)

놀라운 사실은 이런 사람들의 경우 공감성이 매우 높을 수 있다는 점이다.

즉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성이 너무 높아서 가해자가 자신을 부당하게 비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이 하는 말이 틀릴 리가 없어. 내가 무언가 잘못을 한 것이 틀림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가스라이팅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가해자들의 사례를 보면 이러한 공감성이 극도로 낮은 경우가 많았다.

단순하게 가해자들을 소시오패스로 분류하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타인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의견과 사고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없으면 타인에게 그런 언행을 보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가스라이팅 역시 진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전문가를 찾지 않고, 그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전문가를 찾는 정신병자의 역설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가해자를 총 세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가장 관찰하기 쉬운 유형인 '난폭한 가해자는 말이나 행동으로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유형이다.

이 유형의 경우 주변 사람들이 관찰하기도 쉽고, 피해자 역시 객관적으로 가해자가 나쁘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비교적 피해에서 벗어나기가 쉽다.

하지만 '선량한 가해자'나 '매력적인 가해자'의 경우 그 언행이 보다 교묘하기 때문에 주변 지인들이 피해자의 피해를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피해자 역시 가해자를 더 이해해 보려고 노력함으로써 피해를 더 키우게 된다.

특히 피해자가 자신을 부정하고 가해자의 사고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라 믿는 경우 가스라이팅의 피해에서 스스로 빠져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할 수 있다.

상담을 받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것은

"문제가 있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좋은 점은 유지하고 나쁜 측면만 제거할 수 있는가"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pg 178)

저자는 가스라이팅도 그 정도에 따라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1단계의 경우 피해자가 일찍 깨닫기만 하면 좀 더 단호하게 자신과 상대의 관계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좋아질 수 있지만, 2단계, 3단계에 진입하고 나면 이미 심리적인 장악이 너무 많이 진행돼서 스스로의 의지로는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특히 3단계의 경우 중증 우울증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날 정도여서 글로 읽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책의 후반부에는 이러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계별, 유형별 맞춤 대책들이 수록되어 있다.

솔직히 나는 단순히 가스라이팅의 개념이 궁금해서 읽었던 것이라 이 부분은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면 관계를 끊으면 될 일을 왜 이렇게까지 고민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만큼 가해자가 자신의 중요성을 피해자에게 교묘하게 인식시켰기 때문에 피해자는 무엇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조차 타인의 도움이 없으면 깨닫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원하는 삶을 만들겠다는 다짐,

가스라이팅을 배제하려는 노력이다.

그런 노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가장 친한 친구와 절교하거나

이상적인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pg 254)

저자 역시 타인을 변화시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므로 관계를 개선하기 어렵다면 과감하게 끊을 필요가 있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개인적으로도 이 책을 읽고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 '모든 관계는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라는 것이다.

시작도 나의 의지였듯이 관계의 종료도 내 의지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어야 한다.

그래야 교묘하게 나를 조종하려는 가해자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지금은 너무 일반명사화돼서 친구들끼리도 조금만 의견 충돌이 있으면 '어? 가스라이팅이네?'라는 농담을 던질 정도지만 책에 소개된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의 사례는 정말 숨 막히는 것이었다.

실제 사례들을 보고 나니 함부로 그런 농담을 던져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운이 좋아 마흔이 넘게 살면서 아직 한 번도 이런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지만, 사회적으로 충분히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일이기에 관계가 괴로운 사람들이라면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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