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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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도서관 대출

(e북으로 읽었으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 발췌문에 페이지는 생략함)

벌써 네 권째 만나고 있는 작가의 책이다.

이번 책은 단편집으로 총 여덟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포문을 여는 작품은 '영생불사연구소'라는 작품인데 시작부터 상당히 재미있다.

파리 목숨의 대명사인 현대 소시민의 삶과 영생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소재를 재미나게 버무렸다.

저자가 SF 작품들을 잘 쓰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SF라기보다는 뭔가 시트콤 같은 느낌을 준다.

직장인이라면 공감할법한 창립 기념행사라는 별 의미도 없는 행사를 준비하는 말단 직장인의 시각에서 전개되는데, 특히 행사 팸플릿의 단어 하나, 로고 위치 하나로 수많은 피드백을 거쳐야만 했던 말단 직원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웃픈' 현실 그 자체였다.

사실 '영생'이라는 키워드가 이 작품의 반전 요소이기는 하나, 제목에 버젓이 있기도 하고 그 사실을 알고 봐도 재미가 반감되지는 않을 것 같아 그대로 썼다.

표제작이자 무려 '필립 K. 딕 상' 후보작으로 유명한 '너의 유토피아'가 이어진다.

인공지능과 태양열 충전 기능이 탑재된 자동차가 폐허가 된 지표면 위에서 다른 안드로이드를 뒷좌석에 싣고 생존을 위한 사투를 이어가는 내용이다.

일단 작품의 시각이 일반적인 안드로이드가 아닌 자율주행 자동차라는 점이 재미있는데, 이렇게 인공지능이 탑재된 사물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작품이 하나 더 있다.

개인적으로는 표제작보다 더 인상 깊었는데, 'One More Kiss, Dear'라는 작품으로 이 작품의 화자는 무려 인공지능이 탑재된 엘리베이터다.

엘리베이터가 바라본 인간의 노화와 죽음, 그리고 인공지능과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시각 차이를 짧은 단편 안에서 충분하게 경험할 수 있다.

동물과 식물, 자연 현상에 관한 질문에도 90퍼센트 이상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유한함과 죽음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 중략 -

"인간 스스로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One More Kiss, Dear' 中)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그녀를 만나다'였다.

저자의 사회적 시각과 동조하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이 작품이 누구를 추모하기 위해 쓰였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읽었는데도 읽으면서 그 인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자신의 성별 지향과 직업적 소명이라는 별개의 개념이 충돌하면서 잃지 않아도 될 생명을 잃었다.

저자는 '변희수 하사'에 대한 추모 위에 자본의 이름으로 죽어가야 했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추모까지 한 작품 안에 모두 담아내고 있다.

특히 최근에도 비숙련 기간제 계약직 노동자가 뜨거운 쇳물 속에서 끔찍하게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유효하지 않을까 하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기계는 사람을 죽였다. - 중략 -

그리고 사람들은,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기계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그렇게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끔찍하게 죽이는 걸 그저 보고만 있었다.

아니 그저 보고만 있는 건 아니고 사람값과 기곗값을 계산해서 이득을 따지고 앉아 있었다.

('그녀를 만나다' 中)

결코 잊지 않는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삶의 엉뚱한 순간들 속으로 과거의 상실이 비집고 들어오는 걸 받아들이면서

그래도 잊지 않고 세상을 이렇게 만든 빌어먹을 새끼들이 골로 가는 꼬라지를

보고야 말겠다고 나는 살았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나도 나아갈 것이다.

('그녀를 만나다' 中)

그 밖에도 가정 폭력 희생자의 안타까운 성장사를 SF 배경 위에 녹여낸 'Maria, Gratia Plena', 인간이 지구에 가한 폭력에 대항해 식물과의 결합이라는 진화를 이뤄낸 신인류 이야기인 '씨앗' 같은 작품들 역시 사회 비판적인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물론 사회 비판적 시각이 들어있다고 해서(흔히 하는 말로 PC가 좀 묻었다고 해서) 문학의 본질적 가치 중 하나인 '재미'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룬 '여행의 끝', 외계인 배우자와의 공생을 그린 '아주 보통의 결혼' 등의 작품들은 사회 비판적 시각보다는 SF 적인 느낌을 더 많이 주기 때문에 SF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난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수록 작품 대부분에서 상실과 애도의 감정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아직은 쌀쌀한 요즘 날씨에 읽기 딱 좋은 작품들이었다.

그러니까 상실하면 애도해야 하고, 상실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서는

생존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상실된 사람들을 누가 기억해 줄 것인가.

그리고 행동으로 애도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런 상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작가의 말' 中)

한 작가의 책을 반복적으로 읽다 보면 작가에 대한 기대도 계속해서 수정되기 마련이다.

비교적 가벼운 작품으로 저자를 처음 접했기 때문에 이후에 읽은 작품들이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기는 하나,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무거운 느낌의 작품들이 더 취향에 잘 맞는 것 같다.

저자의 대표적인 장편들을 아직 접하지 못했으니 이제 장편으로 눈을 돌려볼까 한다.

여하간 앞으로 어떤 작품을 더 발표할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작가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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