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
윌리엄 골딩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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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출판사 증정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불멸의 명작이라 들었는데 이번에 개정판이 나와 읽어보게 되었다.

읽기 전부터 고립된 곳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을 다룬 작품이라는 점은 알고 있던 터라 소년 몇 명이서 식량을 두고 배틀 로열을 벌이는 내용은 아닐까 예상했는데 그 정도로 단순한 스토리는 아니었다.

작품은 사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 의문의 섬에서 시작된다.

이 섬에 모두 몇 명인지도 모를 다수의 소년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시착해 갇히게 된다.

가장 큰 아이가 12세 정도인 이들이 생존을 위해 서로 돕고 갈등하다 결국 분열하는 이야기라 보면 되겠다.

고립된 공간에서의 생존이라는 소재 자체는 근래까지도 문학이나 영화 등에서 많이 다룬 바 있지만, 대체로는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생존 게임의 형태를 띠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섬에는 풍부한 과일나무와 식수로 사용 가능한 물이 있고,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인 아이들에게 잡혀주는 어리숙한 멧돼지들도 있어서 언제 구조될지 모른다는 점만 빼면 기본적으로는 상당히 오랜 기간을 생존할 수 있는 곳이다. (사실 멧돼지를 한 번이라도 실제로 본 사람들이라면 초등학생이 아무리 많아도 나무 작대기로 그런 동물을 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등장인물 중 그나마 큰 아이들도 지금의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굉장히 어리기 때문에 생존 게임 자체가 가능하지도 않다.

이들의 리더도 우연히 불면 큰 소리가 나는 소라를 발견한 '랠프'라는 소년이 맡게 된다.

그의 곁에는 안경을 쓴 '새끼 돼지'라는 별명의 소년이 있는데, 이 소년은 신체적인 능력은 부족하지만 리더를 도와 올바른 말을 잘 한다.

게다가 그가 쓴 안경으로 불을 피울 수 있게 되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 두 인물의 핵심 과제는 불과 연기를 유지해 혹시 모를 구조대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랠프에게 대장 자리를 빼앗겼지만 사냥을 주도할 수 있는 사냥 팀의 리더를 맡게 된 '잭'이라는 소년이 있다.

그는 능숙하게 사냥감을 쫓아 서슴없이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본능적인 사냥꾼이다.

비록 섬에 풍부한 과일이 있지만 아이들에게 기름이 줄줄 흐르는 고기라는 유혹은 너무도 막강한 위력을 가진다.

잭은 사냥 능력으로 고기라는 선물을 제공함으로써 점차 자신의 세력을 불리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리더 격인 소년도 결국은 어린이인지라 제대로 통솔이 될 리 없고 끝없는 다툼이 일어난다.

아이들이 볼 때에는 구조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고 고기는 '꼭 필요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너무도 달콤한 유혹'이다.

소라를 통해 회의를 소집하고 아이들에게 의견을 물어 의사를 결정하는 등 나름 민주적인 제도를 흉내 내던 아이들이지만 고기의 맛을 본 이들은 점차 민주성을 버리고 야만인과 같은 잭에게 동조하게 된다.

"너도 알지? 나는 너희들의 일부분이야.

아주 밀접하게 가까이 있는 일부분이야.

왜 모든 것이 그릇되게 돌아가고 모든 일이 현재의 이 모양으로 되었는가 하면,

그건 모두 나 때문이야."

(pg 225-226)

이 작품을 한국의 근현대사에 빗대본다면, 지금도 과거의 독재자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전후 폭삭 주저앉은 나라에서 민주니 자유니 하는 것들은 당장의 삶과 너무 거리가 멀고, 춥고 배고프던 시절 당장 고기를 구경할 수 있게 해준 그 시대와 인물들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이 작품 속 아이들보다는 훨씬 지혜로운 이들이 많아서 고기에 넘어가 스스로 민주성을 버리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는 점에 큰 위안을 느끼기도 했다.

사실 인간도 엄연한 동물인지라 먹고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렇기에 경기가 좋지 않으면 무조건 경기 부양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리더들에게 표심이 몰리게 된다.

하지만 그 경기 부양이 언 발에 오줌을 누어 나중에 더 큰 위험으로 다가오지는 않을지 항상 경계해야 한다.

이 책의 후반부처럼 반대 세력을 절멸시키기 위해 삶의 터전을 모두 불태우는 어리석음도 물론 경계해야 할 것이다.

기대했던 것만큼(?) 잔혹한 내용이 많지는 않았고 서사가 쫀득한 느낌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가 우화나 신화로 읽어달라고 했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어린 소년들을 통해 인간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읽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해 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역자 역시 '노벨상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평가로 마무리하고 있는 만큼 과거 노벨상 수상자의 신랄한 인간 비판이 궁금하다면 꼭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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