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 이야기
이스카리 유바 지음, 천감재 옮김 / 리드비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책의 출처: 출판사 증정

SF 장르를 좋아하기도 하고 일본 소설도 꽤 읽는 편인데 여태껏 일본의 SF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장르의 특성상 국가별 문화 차이보다는 저자가 과학적 사실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차용하느냐에 따라 소재나 이야기의 퀄리티가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본의 SF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처음 접하는 저자지만 총 여섯 개의 이야기가 수록된 단편집이라 읽는 부담도 적을 것 같아 읽어보게 되었다.

포문을 여는 '겨울 시대'라는 작품은 제목 그대로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년, 소녀의 이야기다.

갑자기 온 세상이 겨울로 변해버릴 것이라는 예측에 과학자들이 부랴부랴 추위에 적응할 수 있는 동물들을 만들어 냈지만 남은 시간이 너무도 짧아 모든 문명이 엄청난 퇴보를 겪고, 인류는 배고픔과 추위에 고통받는다.

매력적인 배경 설정이지만 포문을 여는 작품 치고는 인상적인 사건이 없어서 평이했던 작품이었다.

첫 작품에 실망할 뻔했지만 이어지는 '즐거운 초감시 사회'라는 놀라운 작품을 만나게 된다.

불세출의 명작 '1984'의 외전 격인 느낌의 작품으로, '1984'에서 설정한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3국 체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만 '1984'가 유라시아 배경이라면 본 작품은 동아시아가 배경이라는 점이 다르고, 문화적 특수성(?)을 고려해 초감시 사회의 주요 장치들도 미묘하게 다르다.

일단 입출력이 모두 가능한 텔레스크린이나 길거리에서도 작동하는 음성, 영상 감시 기술, 막대한 국가 경찰력 등의 장치는 이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마치 현대 SNS의 팔로워처럼 '내가 저 사람의 사상을 감시해 보겠다' 하면 자율적으로 감시 목록에 추가할 수가 있다.

현대의 SNS에서 팔로워가 많으면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듯이,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적 혜택이 따른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감시해도 걸릴 게 없을 만큼 투명한 사람이니 사회가 보상해 준다는 의미다.)

전설적인 작품의 설정을 빌려오되 저자만의 창의력을 더해 새롭게 창조한 세계도 좋았고, 마지막 결말도 굉장히 충격적이어서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담긴 모든 단편 중에 이 작품을 베스트로 꼽고 싶다.

"이제 국민을 지배하는 건 감시당하고 있다는 공포가 아니야.

감시하고 있다는 즐거움이지.

우리 시절에 비해 사태가 훨씬 골치 아파진 셈이네.

사람은 공포나 고통과는 싸울 수 있어도 즐거움이랑은 싸우지 못하거든.

즐거움은 아편이야. 우리 조국은 다시 아편 탓에 병들어 가게 됐고.

(pg 107, '즐거운 초감시 사회' 中)

세 번째로 등장하는 표제작은 화성의 생명체를 찾는 한 과학자가 부모에게 버려진 조카를 키우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서사 자체는 평이한 편이지만, 태초의 한 세포에서 갈라져 나온 우리 인간들이 서로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어 우주 라멘집 이야기인 '중유맛 우주 라멘', 뜬금없이 찾아온 돌 이야기인 '기념일', 질량을 가지지 못해 세상과 작용할 수 없는 투명 인간이 등장하는 'No Reaction' 등 앞선 작품들에 비하면 조금 가벼운 느낌의 작품들이 이어진다.

솔직히 수록 작품들이 전부 마음에 든 것은 아니지만, 몇몇 작품들이 강렬하게 좋았기 때문에 국내에 소개된 저자의 장편도 조만간 읽어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전반적으로 아주 하드한 느낌의 SF는 아니어서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다양한 모습의 미래를 상상해 보고 그 속에서 인간의 삶이 어떤 변주를 보일 수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