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종말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3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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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도서관 대출

벌써 세 번째 접하는 저자의 책이다.

300페이지 중반 정도로 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에 무려 열 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단편집이다.

표지를 열면 저자의 멋진 서명과 함께 '자본주의 타파하고 지구를 지킵시다 투쟁'이라는 문구가 친필로 적혀있다.

아직 빨갱이 감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라 피 끓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포문을 여는 작품은 '지향'이라는 작품으로 다양한 '성적 지향' 중에서도 '무성애자'에 관한 이야기다.

주제가 주제인지라 여러 소수자들의 이야기들이 버무려져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이쪽으로 공부를 많이 했나 보다' 정도의 감상 이외에 서사적으로는 큰 재미를 느끼기 어려웠다.

살짝 실망감이 찾아올 때쯤 읽게 된 두 번째 작품인 '무르무란'은 신석기 시대쯤 될 때의 인류를 상상해 본 작품으로 죽음과 죽음을 먹는 괴물이라는 판타지적인 요소와 사냥과 도구 제작, 동굴 벽화라는 현실적인 소재들이 만나 상당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었다.

인류가 수렵채집 생활을 할 때에는 모계사회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데, 이 작품 역시 모계로 이어지는 지식과 문화의 전수를 주제로 삼고 있다.

저자가 페미니즘적 작품을 많이 쓰긴 하지만 그런 소재들이 서사의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고 오히려 매력적인 장치로 작용하고 있어서 읽는 맛이 좋았다.

두 번째 작품부터 재미가 올라오기 시작할 때쯤 만나게 되는 '개벽'은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에 빠지는 사람들이 어떤 심리로 그렇게 되는지를 짧은 이야기 안에 잘 녹여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수록작 중 가장 재미있었는데, 실제로 가족 친지 중 다단계에 빠져 큰일을 당할 뻔한 적이 있었던 터라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표제작은 성소수자라는 다루기 까다로운 소재를 사이보그라는 SF의 가장 전형적인 소재와 버무려낸 작품이다.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그런 사람에게 어느 날 거대 네트워크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라며 온전한 사이보그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면 어떨까?

외로움에 굴복하기보다 그 외로움이야말로 진짜 인간을 만드는 요소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한자리에 같이 있더라도, 심지어 신체가 접촉하고 있을 때에도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감각을 완전하게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몸속에 갇혀있고 그것이 실존적 고립이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언제나 실존적 거리가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실존적 거리 때문에, 실존적으로 고립된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각자 고유하다는 것이다.

(pg 153, '작은 종말' 中)

그 밖에도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희생된 자들의 기억을 세대를 넘어 전달하는 이야기인 '증언', 군대와 감시 기술로 자유를 빼앗긴 사회에 맞서 결연한 투쟁의 의지를 이어가는 자매의 이야기인 '행진'이라는 작품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얼마나 쉽게, 또 악랄하게 억압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또한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에 대한 이야기인 '은둔자의 영혼', 외계인의 시각으로 지구인의 모순을 보여주는 '통역', 지식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인프라인 도서관에 대한 찬양이 돋보이는 '도서관 물귀신', 엄연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싸다'라는 취급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낙인'까지, 모든 작품들에서 힘이 없어 당해야만 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인물들을 통해 지금의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여러 모순들을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저자의 작품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단편집이어서 호흡이 그리 길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작품들이 읽고 나면 한참 동안 여운을 곱씹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저자의 단편집이 몇 권 더 있지만, 이제는 저자의 장편에도 손을 뻗을 시기가 된 것 같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이 많아서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작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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