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의 여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0년에 나왔던 '녹나무의 파수꾼(이하 '전작')'에 이어 올해 새로 나온 신작이다.

전작에서 거부였던 이복 이모의 의지에 따라 녹나무의 파수꾼이 된 레이토가 녹나무의 신비한 힘으로 주변 사람들을 도와주는 따뜻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작을 굳이 읽지 않았어도 전작에 이어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리 많지 않고 이번 작품에서도 모두 그 관계를 설명해 주기는 하지만, 작품의 제목이자 주요 소재가 되는 녹나무의 신비로운 힘은 알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작품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므로 책을 읽을 예정이라면 하단부터는 읽지 않기를 권한다.)

작품 속 등장하는 녹나무는 사람들의 기억을 백업해 주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기억을 전수하고자 하는 이가 녹나무 안에서 초를 피우며 기억을 회상하면 그 내용이 마치 업로드되듯이 녹나무에 저장이 되고 나중에 그 사람의 친족이 그 기억을 온전히 다운로드할 수 있는 것이다.

컴퓨터의 백업과 다른 점 중 하나는 업로드를 하는 이가 원하는 기억만 쏙 빼내어 업로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좋은 점뿐만 아니라 숨기고 싶은 점, 전수되지 않았으면 하는 기억까지 온전히 전해지게 된다.

전작이 이러한 녹나무의 비밀을 천천히 밝혀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었다면 본작에서는 이 신비로운 힘으로 등장인물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책의 시작은 파수꾼인 레이토에게 한 고등학생 소녀가 찾아와 자신이 직접 쓴 시집이라며 판매 대행을 부탁한다.

수작업으로 만든 것이라 판매량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뭔지 모를 사연이 있을 것 같아 이를 수락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중년 남성이 이 시집을 그냥 집어가려다 들통난다.

돈이 없다며 그냥 시집을 두고 가겠다는 남성에게 소녀는 그냥 시집을 선물로 주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동네에서 강도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여기에 이 남성과 소녀가 얽히게 된다.

"<헤이, 녹나무>를 읽은 순간에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여기서 말하는 녹나무는 여신인 거에요.

몇백 년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여신."

(pg 170)

레이토의 이복 이모는 전작부터 기억을 조금씩 잃는 '인지증'에 걸린 것으로 나오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 증상이 한층 더 심해진다.

위 강도 사건이 있은 후 레이토는 이복 이모처럼 인지증 환자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갔다가 한 중학생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 소년은 뇌종양 수술을 받은 후 특정 시점 이후로는 단 하루도 기억을 쌓아가지 못하는 증상이 생겨 오늘 밤 잠에 들면 내일 아침에는 다시 어제 아침의 기억 상태로 일어나게 되는 사연을 가진 소년이다.

이 소년이 그림에 재능이 있어서 문학에 재능을 가진 소녀와 함께 멋진 작품을 만들어 가면서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의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초반의 강도 사건이 저자의 전매특허인 미스터리 장르처럼 사건 속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 가는 재미를 보여준다면, 그 사건이 일단락된 후부터는 본격적인 힐링 소설로 장르가 확 바뀌게 된다.

그러면서도 초반의 사건이 후반부까지 가서야 온전히 마무리되어 이야기의 전개 측면에서는 훨씬 더 짜임새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는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미래 같은 건 필요 없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런 건 상관없다. 그런 건 몰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지금이다.

(pg 310)

이번 작품 역시 거의 400페이지에 육박하는 짧지 않은 길이지만 저자의 작품답게 페이지가 쉴 틈 없이 넘어간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가슴이 따뜻해지는 내용을 담아내고 있어서 시체와 선혈이 낭자한 저자의 다른 작품들보다는 훨씬 폭넓게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녹나무의 신비로운 힘이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치로 쓰일 수 있는 만큼 앞으로도 이 소재로 어떤 작품이 더 나올 수 있을지 저자의 팬으로서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