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합본 특별판)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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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라는 생소한 국가의 생소한 저자가 쓴 소설로 부모님 댁 책꽂이에서 발견하게 되어 우연하게 읽어보게 되었다.

한 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소설이기도 하고, 그 안에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도 있으며 범죄와 음모, 믿음과 배신이 난무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두 권으로 나누어진 판본으로 읽었는데 지금은 합본이 나온 모양이다.)

작품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직후의 스페인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이 사람들과 사회에 남긴 상처는 그대로인 시대, '다니엘'이라는 소년이 서점 주인인 아버지를 따라 '잊혀진 책들의 묘지'라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다니엘은 '훌리안 카락스'라는 무명작가가 쓴 '바람의 그림자'라는 소설을 만나게 되고 그 작품에 푹 빠진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다른 작품을 구하기는 매우 어려웠고, 작가의 정체도 베일에 싸여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바람의 그림자'에 등장하는 악마의 이름을 사칭한 누군가가 작가의 작품을 골라 불태우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돌게 된다.

다니엘은 작품과 작가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유년기의 함정들 중의 하나는 느끼기 위해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성이 사건을 이해할 수 있을 때는 이미 가슴속의 상처가 지나치게 깊어진 후다.

(1권, pg 58)

작품은 크게 전쟁이 끝난 '다니엘'의 현재 시점과 전쟁 이전인 '훌리안'의 과거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

추리소설의 전개처럼 여러 인물들의 증언을 토대로 과거의 일들이 조금씩 밝혀지는 구조로, 여기에 과거와 현재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도 담겨 있고 그 사랑을 둘러싼 갈등도 존재한다.

세월은 공허할수록 더 빨리 지나가지.

의미 없는 삶들은 역에 서지 않는 기차들처럼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법이거든.

그러는 동안, 전쟁의 상처들은 필연적으로 아물게 됐지.

(2권, pg 308)

작품의 화자인 다니엘과 공동 주연이라 불러야 할 훌리안도 매력적이지만 그 밖에도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다니엘이 첫사랑에 실패할 뿐 아니라 비참하게 얻어맞은 채 누워있을 때 그에게 다가온 노숙자 '페르민'은 이 작품의 감초라 할만하다.

전쟁이 터지기 전 모종의 이유로 노숙자가 된 그는 다니엘의 추천으로 서점 직원이 되는데,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쓸 뿐 아니라 주옥같은 비유로 작품에 깨알 같은 재미를 더한다.

내가 말하려던 건 말야, 사랑은 돼지 가공육 같다는 거야.

등심도 있고 소시지도 있지. 모든 것들이 자기 자리와 기능이 있다는 말이야.

(1권, pg 313)

두 권을 합쳐 800페이지 가까이 될 정도로 작품의 호흡은 짧지 않다.

하지만 배경과 인물들의 매력 때문에 읽어가는 여정이 지루하지 않았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밝혀지는 반전도 있고, 엔딩 역시 많은 사람들이 흡족해할만한 결말을 보여준다.

특히 결말 이후 짧게 등장한 인물들이라 하더라도 잊지 않고 후일담이 등장해서 작품에 대한 애정이 마지막까지 잘 유지될 수 있었다.

언젠가 훌리안은 이야기란 작가가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쓰는 편지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지.

(2권, pg 328)

작품의 주인공이 서점 주인의 아들이고 내용 역시 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책과 문학에 대한 저자의 애정도 스토리 곳곳에 녹아있다.

TV가 막 이제 보급되려 할 때가 작품의 배경이라 등장인물들이 이제 책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하지만 TV의 시대를 지나 인터넷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요즘도 책은 굳건히 살아남아 있다.

모두들 종이책의 시대는 이제 곧 저물 것이라 말하지만, 모두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지하고 있다.

어차피 읽을 사람은 계속 읽을 것이고, 읽지 않을 사람은 앞으로도 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거울이라고,

우리들은 책 속에서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발견할 뿐이라고,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걸고 독서를 한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희귀해져가고 있다고 배아는 말한다.

(2권, pg 386)

별 기대 없이 읽게 된 작품인데 초반에 몰입하기가 썩 좋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사랑 이야기를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범죄와 음모가 그 사이사이에 끼여 있어서 꽤 긴장감이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고, 조금씩 이야기의 비밀이 밝혀지는 구조도 마음에 들었다.

나온 지 꽤 된 작품이기는 하지만, 스페인의 아름다움과 전후를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대비가 강렬해서 영상화되어도 좋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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