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 필립 K. 딕 단편집
필립 K. 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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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도 적지 않지만 단편이 더 많은 저자의 단편집이다.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 두께로 25개의 단편이 알차게 들어차있다.

개인적으로는 들고 읽기가 힘들 정도여서 두 권으로 나눠서 발매해 주면 참 좋았겠다 싶지만 그럼에도 다 읽고 나서 그의 후기 작품들을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는 극한의 뿌듯함을 맛볼 수 있었다.

표제작은 '토탈 리콜'이라는 영화의 원작으로 더 잘 알려진 작품이다.

작품을 읽은 후 1990년에 나온 영화와 2012년에 나온 영화를 모두 봤는데, 원작의 핵심 아이디어는 유지하면서도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펼쳐줘서 재미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보통 2012년 영화는 망작이라는 평가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콜린 패럴이라는 배우를 워낙 좋아해서 재미나게 본 것 같다.)

이 작품의 핵심은 자신이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하는 것인데, '어서 그곳에 도착했으면'이라는 작품 역시 비슷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다.

스스로 판단하는 컴퓨터가 의도치 않게 우주여행 중 깨어난 한 인물에게 행복감을 선사하려고 애쓰는 작품으로, 자신의 기억을 자신이 믿지 못하는 상황뿐만 아니라 매사 부정적인 인간이 얼마나 피곤한 존재인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수록작 중에는 저자의 다른 장편과 연결되는 작품들도 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의 세계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머서교'가 등장하는 작품인 '작고 검은 상자'와 '닥터 블러드머니'의 요약본 같은 느낌을 주는 '테란 오디세이'라는 작품이다.

이미 두 장편을 모두 읽어본 터라 읽자마자 '어디서 봤더라' 싶었는데 읽다 보니 장편들과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른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대기의 사슬, 에테르의 그물'이라는 작품도 '성스러운 침입'이라는 장편으로 발전되는 작품이라는데 해당 장편은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연관성을 찾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수록작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은 '전 인간'이라는 작품이었다.

인구가 통제 불능으로 늘어나자 낙태라는 개념을 출산 이후로도 연장한 사회를 그리고 있다.

원치 않는 아이를 강제로 낳음으로써 부모, 자식 모두 불행해지는 것보다는 낙태가 낫다고 보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는 생각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사실 언제부터 '인격'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과학적인 설명보다는 분명 인위적인 법적, 사회적인 기준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논란이 따를법한 작품이고, 후미에 수록된 저자의 말에서도 저자 역시 상당한 논란에 시달렸음을 고백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시간 여행의 실패로 타임 루프에 갇히는 인물들을 그려낸 '시간 여행자를 위한 작은 배려'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세상을 상상한 '약속은 어제입니다', 육체가 없는 플라스마 상태로 존재하는 외계 종족이 등장하는 '라우타바라 사건' 등 독특하고도 매력 넘치는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가득하다.

사람이면 누구든 다른 사람보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더 많은 법이야.

나한테는 같이 잘 수 있는 귀여운 아가씨는 없지만,

해 질 녘에 리버사이드 도로를 따라 굴러가는 대형 화물차는 몇 번 더 보고 싶다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살아서 무엇을 볼 수 있느냐, 그곳에 있을 수 있느냐가 문제지.

그게 정말로 슬픈 거라고.

(pg 484, 시간 여행자를 위한 작은 배려 中)

워낙 수록작이 많아 다 요약하기도 벅차지만 그만큼 저자의 다양한 상상력을 책 한 권으로 접해볼 수 있다는 압도적인 장점이 있는 책이므로 저자의 팬이라면 놓치지 말고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집이 넓은 편이 아니라서 보통 한 번 읽은 책은 미련 없이 처분하는 편인데, 이 책은 꽤 오랫동안 책장을 지키고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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