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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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발간된 저자의 장편소설이다.

이번에도 역시 SF라서 취향에는 잘 맞을 것 같아 읽어보게 되었다.

근래에 나온 책이지만 표지 디자인이 썩 예쁜 편은 아닌데, 읽다 보면 나름 세계관을 충실하게 반영한 표지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작가의 말'에 우주로 떠나는 대신 지구를 좀 더 낯선 곳으로 바꿔보자는 생각으로 집필했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본 작품 속 지구는 지금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외계에서 온 '범람체'라 불리는 포자 생물이 있는데 이 생물은 지구상의 모든 유기체에 기생할 수 있으며 무기물은 부식시킨다.

이들은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지표를 장악한다.

인간이 범람체에 당하게 되면 서서히 자아를 잃고 범람체에 육체와 정신이 종속된다. (즉 유기체를 좀비로 만드는 곰팡이나 버섯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작은 개체에 머무를 때에는 그저 본능이 지배하는 생물이지만 일정 수준 군집을 이루게 되면 그 안에서 지성이 생겨나고, 개별의 정체성을 간직하면서도 집단의 의식이 공존하는 독특한 세계를 형성한다.

이 생물에 습격당한 인류는 지상을 포기하고 지하로 들어가 도시를 건설하고 살아간다.

본래 인류의 것이었던 지구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인류는 끊임없이 지상을 탈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이를 위해 지상을 탐사하거나 국지적인 전투를 벌이는 '파견자'라는 집단을 육성한다.

작품은 머릿속에서 이상한 환청이 들리는 '태린'이라는 소녀의 시각으로 진행된다.

어릴 적 자신을 거둬준 파견자를 따라 자신도 파견자가 되려 하는데, 머릿속 환청에게 때로는 도움을, 때로는 방해를 받으며 초중반이 이어진다.

중반 이후 범람체 군락과 조우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최대한 스포일러 없이 쓰려고 하겠으나, 하단에는 일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저자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 소개만 읽고 바로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물론 태린이 인간과 범람체의 조합이라는 사실은 초반부터 그리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재미난 점은 범람체들이 인식하는 자아의 개념이 인간의 인식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에 있다.

너희는 이미 수많은 개체의 총합. 하나의 개체로는 너희를 설명할 수 없어.

네 안에는 다른 생물들이 잔뜩 살고 있어.

'미생물들을 말하는 거야?

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 의존해 살 뿐이지, 나와 이어져 있는 건 아니야.

내가 의식하는 나라는 개체는 단 하나인걸.'

그 존재들은 너와 같이 살 뿐만 아니라, 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어.

의식이야말로 주관적 감각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pg 182-183)

즉 범람체들은 군집을 이루면 자신이라는 경계가 녹아 없어지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목소리는 유지하되 공동체와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

기존의 작품들에서 굳이 예를 찾아보자면,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이 언제든 '에이와' 속 영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상태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작품 초반의 범람체는 마치 '기생수'처럼 인간이라는 종을 그저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는 생물로 보였지만, 중반 이후로는 인간의 몸에서 각자의 자아를 유지한 채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인간의 수명이 다 하면 범람체의 군집으로 돌아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인류와 외계의 생명체가 지구를 무대로 공존하는 세상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남기며 작품을 마무리한다.

자아란 착각이야. 주관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착각.

너희는 단 한 번의 개체 중심적 삶만을 경험해 보아서

그게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고 착각하는 거야.

우리를 봐. 우리는 개체가 아니야.

그럼에도 우리는 생각하고 세상을 감각하고 의식을 느껴.

의식이 단 하나의 구분된 개체에 깃들 이유는 없어.

우리랑 결합한 상태에서도 너희는 여전히 의식을 지닐 수 있어.

(pg 241)

저자의 책을 벌써 네 권째 읽고 그중 장편도 두 번째인지라 저자의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소재의 참신함에 비해 스토리의 참신함은 다소 부족한 느낌이었다.

저자의 이야기들에 익숙해서 그런지, 내가 SF를 많이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읽으면서 앞으로의 전개를 예상하기가 굉장히 쉬웠다.

주인공의 성장 배경이라던가, 중간에 일어남직한 사건들, 후반에서야 밝혀지는 흑막과 마지막 결말에 이르기까지 예상을 벗어나는 지점이 크게 없어서 살짝 아쉬웠다.

하지만 드디어 저자의 여성 캐릭터 강박이 조금은 옅어진 느낌이라 반가웠다.

집사람이 앞 부분을 읽고서 인물들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모르겠다길래 '남자라는 명확한 언급이 없으면 무조건 여자라고 생각하면 된다'라고 알려주었는데, 이 조언은 물론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자들도 주연급은 아니지만 조연급으로는 등장해 줘서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작가의 경력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거듭해서 작품을 발표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동시에 자신만의 세계를 잘 구축해 나가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나이도 상당히 어린 편인지라 앞으로 어떤 작품을 더 발표할지 기대가 되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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