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 - 불완전한 진화 아래 숨겨진 놀라운 자연의 질서
앤디 돕슨 지음, 정미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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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표지에 마치 철학 책처럼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제목이지만 생각해 보면 폐호흡을 하는 고래가 물 밖에서 숨을 쉬는 것은 당연한 소리다.

하지만 저자는 이 당연한 사실에서 하나의 의문을 찾아낸다.

우리보다 훨씬 더 먼저 지구에 존재했던 고래는 왜 아직도 물속에서 호흡하는 법을 진화시키지 못했을까?

저자는 진화와 자연선택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자연의 변화에 따라 '최적화되듯이' 진행되는 과정이 아님을 설명하고자 이 책을 썼다.

진화는 그저 무작위적인 돌연변이가 때마침 이점을 가질 수 있고 그 형질을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 때에만 일어나는 매우 느리고도 예측할 수 없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사례를 들어 진화가 일반적으로 보기에 생활에 더 불편한 방향으로, 심지어는 생존에도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선 진화가 필요에 따라 적응 형태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그 대신 자연 선택은 우연히 발생한 유용한 돌연변이만 선호할 수 있다.

어떤 형태에 대한 필요와 긴급성은 돌연변이의 채택과 개체군에 퍼지는 속도를

규정하긴 하겠지만, 애초에 적절한 돌연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돌연변이는 순전히 우연에 의해 생긴다.

(pg 78-79)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진화의 가장 대표적인 관계는 목숨/식사 원리라 부르는 법칙에 따르는 동물들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의 관계를 떠올리면 되는데, 육식동물의 경우 사냥에 실패하면 그저 한 끼를 굶을 뿐이지만 초식동물은 한 번 도망에 실패하면 그 즉시 목숨을 잃게 된다.

따라서 진화에 대한 압박이 더 강한 쪽은 언제나 초식동물이기에 초식동물의 진화 속도가 더 빠르고, 육식동물은 이 뒤를 따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학 때문에 육식동물의 사냥법이 아무리 발달해도 초식동물들이 멸종하지 않고 공진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는 생물들이 훨씬 더 많다.

탁란하는 새들부터 바이러스 같은 기생 생물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례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역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성선택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공작새처럼 누가 봐도 생존에 불리할 것 같은 진화 형태를 보이는 생물들이 있다.

여기에도 재미난 법칙이 적용되는데, 몸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종의 경우 암수 중 육아에 책임을 지지 않는 성별이 몸을 치장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점이다.

공작처럼 이런 경우는 주로 수컷들이지만, 드물게 암컷이 치장하는 형태로 진화하는 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수컷들이 알이나 새끼를 돌본다.

육아에 쓰일 에너지가 몸 치장으로 전환될 수 있어야지만 그런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한 외부환경의 변화가 세대를 거듭하며 진화를 축적할 시간보다 월등히 빠르다면 당연히 종 전체가 절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빠른 변화 중 상당수가 인간의 활동에 기인한다는 점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일 것이다.

책에서도 인간의 눈에 띈지 불과 27년 만에 절멸한 '스텔러바다소'의 사례가 등장한다.

모든 종은, 겉으로 봤을 때 번성하는 종이라도 결함을 갖고 있다.

그들은 단지 '그런대로 괜찮을' 뿐이며, 진화적 기벽, 태만, 서투른 솜씨 등

여러 잠재적 결함 중 하나 이상을 갖고 있다.

(pg 313)

게임이나 만화에서 '진화'라는 단어를 너무 극적인 형태로 사용하다 보니 흔히 진화라고 하면 '무언가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라는, 가치가 포함된 단어라고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의 진화는 그저 축적된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특질이 외부 환경에 따라 변화했을 때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것이었을지 몰라도 현시점에서 볼 때엔 '왜 이렇게 불편하게 변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복잡한 적응은 아주 작은 단계들을 통해 서서히 진행되며, 그 각각의 단계는 점진적인

경로를 따라 적응도를 늘리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단계는 자연 선택에 의해 선호될 수 없고,

그에 따라 다음 단계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pg 335)

여러 생물을 통해 진화의 민낯을 보여주는 여정은 인류와 바이러스의 비교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바이러스 역시 최대한의 증식이 목적이므로 숙주 안에서 계속 증식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이 너무 지나쳐 숙주가 죽어버리면 더 이상 다른 숙주로 이동할 기회를 잃어 바이러스 입장에서도 손해인 경우가 있다.

숙주 없이는 바이러스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숙주 안에서 충분히 증식하되 죽게 만들어서는 안되는데, 인간 역시 이러한 함정에 걸려들 수 있다고 저자는 엄숙히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바이러스, 지구가 숙주라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전반적으로 꽤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300페이지 후반으로 그리 얇지 않지만 학술적인 내용보다는 사례 위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진화에 방향성이 없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 새롭지 않았지만 다양한 생물들의 사례로 생생하게 진화의 실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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