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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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블로거를 표방하고 있지만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과제처럼 느껴지는 책을 읽고 싶지는 않아서 세월이 좀 지난 문학 작품들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작품들에 손이 가려면 계기가 필요한데 그중 하나가 새로운 판본의 등장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내용이 같다 하더라도 철 지난 폰트와 디자인의 책과 깔끔하고 산뜻한 신형 판본의 책은 독서 경험의 측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가져온다.

그런 의미에서 거장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이 예쁜 표지로 재출간된 것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일단 책을 펼 때 기분이 좋다.

옅은 녹색 계열로 표지는 물론이고 책배 부분까지 통일된 색채여서 눈이 편안하다.

폰트도 크고 간격도 넉넉해 400페이지 정도로 얇지 않은 책임에도 읽는데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부담으로 나가올지도 모르겠다.

물론 저자가 픽션임을 반복하여 주장하긴 했으나, 저자의 개인적 역사가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사실상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조상 중 누군가는 필히 저자와 비슷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품은 6.25 전쟁이 막바지에 달할 무렵, 미군 PX에서 기념품용 초상화를 그려 판매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화자는 '이경'이라는 젊은 여성으로 미군들을 상대로 그림 의뢰를 받아 화가(책 속 표현으로는 '환쟁이')들에게 일감을 나눠주는 일을 한다.

그러던 중 '옥희도'라는 화가가 새로 들어오게 되고, 그녀는 다른 '환쟁이'들과는 무언가 질적으로 다른, 그만의 고독을 품고 있는 듯한 그에게 끌리게 된다.

좀 전의 충족감이 포말처럼 꺼졌다. 나는 그에게서 소리 없이 밀려나 있었다.

침팬지와 옥희도와 나⋯⋯. 각각 제 나름의 차원이 다른 고독을,

서로 나눌 수도 도울 수도 없는 자기만의 고독을 앓고 있음을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pg 87)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이 작품이 정말 50여 년 전에 나온 작품이 맞는가, '이경'이라는 캐릭터가 정말 50여 년 전의 여성 캐릭터가 맞는가 하는 점이었다.

물론 쓰인 단어나 말투는 결코 요즘의 언어가 아니고, 다른 인물들의 생각 역시 구태의연한 옛날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그녀가 보여주는 태도나 삶에 대한 자세, 특히나 탁월한 '어장관리' 능력(그녀는 유부남을 포함, 총 세 남성의 마음을 흔든다.) 등 요즘 MZ 세대라 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만큼 독특한 솔직함을 가진 캐릭터였다.

나는 내가 도저히 견제할 수 없는 여러 갈래의 많은 '나'의 제멋대로의

아우성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아우성들을 간추린다거나 억누를 생각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이

그 아우성들에게 나를 조금씩 나누며 빙빙 어지럽게 맴을 돌고 있을 뿐인 것이다.

(pg 201)

그녀가 보여주는 독특한 삶의 태도의 근원적인 이유는 중반 이후에나 드러나게 되지만 초반부터 짐작하기 어려운 부분은 아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살상 행위는 그 살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예리한 상처를 남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언제 사망자 대열에 합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살아남은 자 특유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좌절스러운 현실 속의 청춘으로서 그녀는 세상에 저주를 퍼붓기도 하고 희망을 가져보기도 하며 죽고 싶기도 하고 살고 싶기도 한 양가적인 감정들을 느낀다.

사실 우리 모두 누구나 조금씩은 '이렇게 살아 뭐 하나'라는 자아와 '그래도 열심히 살아 봐야지'라는 자아가 끊임없이 부딪히며 살아간다.

전쟁은 그 모든 갈등을 더 극단적인 모습으로 바꿔놓을 뿐이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평화를 바라고 있지만 그렇게는 안 될걸.

전쟁은 누구에게나 재난을 골고루 나누어주고야 끝나리라.

절대로 나만을, 혁이나 욱이 오빠만을 억울하게 하지는 않으리라.

거의 광적이고 앙칼진 이런 열망과 또 문득 덮쳐오는 전쟁에 대한 유별난 공포.

나는 늘 이런 모순에 자신을 찢기고 시달려, 균형을 잃고 피곤했다.

(pg 49)

그러고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곧이어 살고 싶다로 고쳤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두 상반된 바람이 똑같이 치열해서 어느 쪽으로도 나를 처리할 수 없다.

(pg 225)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크게 와닿았던 감정은 절망도, 희망도 아닌 권태의 감정이었다.

생존 이외의 가치는 전부 무의미한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시대, 작품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삶을 이어가면서도 그 안에 저마다의 권태를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땐 맴을 돌고, 커가면 술을 배우고.

사람들은 원래가 똑바로 선 채 움직이지 않는 세상이

권태롭고 답답해 못 견디게 태어났나 봐."

(pg 380)

이야기의 흐름 자체는 예상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물론 워낙 유명한 작품이어서 기억나진 않지만 예전에 줄거리 요약 따위를 읽었던 적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강렬한 문장들을 눈으로 서서히 곱씹으면 배어나는 독특한 맛에 이끌려 끊임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이제는 역사 저편으로 박제된 '옥희도'의 그림처럼 잊혀가는 시절의 이야기지만 그 안의 인간적인 삶과 고뇌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도 현실적으로 보일 것이다.

늦은 만남이었지만 지금이라도 이 작품을 만나게 되어 다행한 마음으로 다음 책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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