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유희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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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일본에는 추리 미스터리 분야에 대단한 작가들이 많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데도 몰입도나 재미 면에서 정말 탁월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주인공이 변호사인 법정물이다.

조사해야 할 것이 많아서 작가들이 쉽게 도전하지 않는 분야인데 첫 작품부터 법정물을 썼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작가 소개를 보니 작가가 현직 변호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90년 생으로 나이도 젊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법 관련 지식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는 한도 내에서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잘 해줘서 법 지식이 전무해도 읽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이야기는 한 로스쿨에서 재미 삼아 진행하는 재판 놀이인 '무고 게임'으로 시작된다.

누군가가 고의로 범법 행위를 저지르면 피해를 입은 사람이 범인을 찾아내 고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이때 판사는 범인을 옳게 찾아냈다고 판단되면 범인에게 피해자가 받은 만큼의 피해를 벌로 내리게 된다.

이 게임이 '무고' 게임인 이유는 말 그대로 피해자가 엉뚱한 자를 범인으로 몰았다고 판단되면 되려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죄를 저지르지 말라고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자신이 달아나기 위해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

마지막 선을 넘는 짓이야."

(pg 59)

여하간 게임은 게임인지라 비교적 가벼운 범죄(?)인 명예훼손과 절도 사건이 일어나 무고 게임이 진행된다.

처음에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이어지지만, 등장인물들이 모두 수료한 이후 이 게임의 판사 역할을 도맡았던 동기가 죽은 채 발견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현장에서 주인공과 함께 자라온 여성이 온몸에 피를 묻힌 채 발견되는데, 주인공이 이 여성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작품이라고 보면 되겠다.

내 앞에 피고인이 열 명 있다고 치자.

피고인 중 아홉 명이 살인범이고 한 명은 무고한 사람이야.

아홉 명은 즉시 사형에 처해야 할 죄인이지.

하지만 누가 무고한지는 끝까지 알아낼 수 없었어.

열 명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인가, 무죄를 선고할 것인가. 심판자에게는 판단이 요구돼.

살인귀를 사회로 돌려보내면 수많은 피해자가 나올지도 몰라.

하지만 난 망설이지 않고 무죄를 선고할 거야.

단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pg 86-87)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으나, 법정물이니만큼 그 결과가 유죄이거나 무죄이거나 둘 중 하나일 테지만, 장담컨대 이 작품의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서사를 치밀하게 잘 조직해놨고, 결말을 다 읽은 다음에도 굉장한 여운이 남았다.

작가가 변호사인지라 주인공도 매우 멋진 변호사로 나올 것이라 예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부족한 측면이 많이 보여서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영화로 만들어도 꽤 재미있을 이야기라 기대가 된다.

문체 역시 일반적인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전형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편이라 페이지가 쉴 새 없이 넘어갔다.

덕분에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읽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과연 진짜 정의는 무엇인지, 법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었다.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판사가 결정하지만...원죄인지 아닌지는 신밖에 모릅니다.

(pg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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