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금고 워프 시리즈 6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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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독서 블로거를 표방하는 자가 할 말은 아니지만 직장에도, 집 근처에도 도서관이 있고 서평 이벤트로 받는 책도 많아서 책을 읽는 양에 비하면 내 돈 주고 구입하는 책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그런 내가 오랜만에 예약 구매까지 해서 받은 책이다.

SF 소설계에서는 테드 창과 더불어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그렉 이건의 작품으로 국내에는 두 번째 소개되는 작가의 단편집이다. (장편은 '쿼런틴' 1권만 출간되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성격상 어지간한 책은 한 번 읽으면 팔아버리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편인데 이전에 읽었던 저자의 '내가 행복한 이유'와 '쿼런틴'은 너무 좋아서 소장할 마음으로 보관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 역시 예약 소식을 듣자마자 사게 되었다.

저자가 하드 SF를 추구하기 때문에 사실 저자의 작품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특히 '플랑크 다이브'처럼 본격적인 과학 이야기가 이어지는 작품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은 저자 특유의 상상력을 따라갈 수만 있다면 나처럼 태생적인 문과여서 지식적인 측면이 다소 부족해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총 14개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번 책에서는 특히 유전자 조작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돈만 있으면 원하는 특질들을 모아 슈퍼 아기를 만들 수 있는 이야기인 '유진'과 수정란 때부터 조작이 들어가 제한된 수명과 지능을 지닌 애완용 아기(?!)가 등장하는 '큐티', 탯줄까지 통제해 성소수자가 아예 태어나지 못하게 막으려는 세력이 등장하는 '고치' 등의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건조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이를 통해 유전자 조작이 인간 사회가 이룩한 무형의 가치들을 꽤나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갓난애들이 떠올리는 '웃음'이란 실제로는 바람에 대한 반사적 반응에 불과하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고 불쾌하게 느꼈던 것을 기억했다.

글의 내용이 불쾌해서가 아니라 잘난 체하며 굳이 그런 따분한 지식을 퍼뜨리고

싶어 한 글쓴이의 오만함이 괘씸해서였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도대체 이 '인간성'이라는 마법의 정체가 무엇일까?

적어도 그것의 절반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pg 135)

'유괴', '이행몽', '우리 사이의 간극', '플랑크 다이브'등의 작품에서는 마인드 업로딩 기술이 다뤄진다.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뇌는 데이터화하고 신체는 복제품으로 교체함으로써 수명을 극단적으로 늘린 세상을 그리고 있는데, 현재에도 빅 데이터를 통해 고인을 대체하는 AI 아바타가 나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꽤 가까운 미래에 실현 가능한 삶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포분열이란 끊임없이 그 형상에 맞춰 재구축되고 있어.

세포분열이란 원래 있던 세포가 죽고 그걸 모방한 후임자와 대체되는 현상이야.

지금 당신 몸에는 당신이 태어났을 때 갖고 있던 원자는

단 한 개도 남아 있지 않다는 얘기지.

그렇다면, 당신이라는 개체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게 뭐라고 생각해?

그건 바로 정보의 패턴이야. 물리적인 게 아니라고.

(pg 24)

표제작인 '대여금고'와 '산책'이라는 작품에서는 의식과 신체가 별도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마인드 업로딩이라는 기술 자체가 의식과 신체는 별개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긴 하지만 이 두 작품에서는 그러한 기술 없이도 그런 것이 가능한 세상을 그리고 있어서 새로운 느낌이었다.

'결정하는 자'와 '스티브 피버'의 경우 외부에서 뇌에 직접적인 자극이 가해질 때 이를 우리 자신의 사고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전 작품집인 '내가 행복한 이유'와 유사한 문제의식이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어려운 부분이 없진 않았으나 그 안에 담긴 상상력과 질문은 상당히 흥미로워서 전반적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의 명성 대비 국내에 소개된 책이 그리 많지 않은데, 인터넷을 찾아본 결과 그의 작품, 특히나 장편 중에서는 '쿼런틴'이 그나마 쉬운 편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저자의 작품들을 일반적인 번역가가 번역하는 것조차도 힘들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저자의 작품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픽션이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의 유무나 세부적인 디테일에 집중하기보다는(물론 그렇게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기는 할 것 같다.) 상상력과 저자의 문제의식에 집중하며 읽는다면 보다 심리적인 장벽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

여하간 앞으로도 계속 그의 저작들이 발매될 예정이라고 하니 팬 입장에서는 행복한 기다림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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