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나의 죽음에 동의합니다 - 있는 힘껏 산다는 것, 최선을 다해 죽는다는 것
진 마모레오.조해나 슈넬러 지음, 김희정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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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나 장애로 겪는 고통이 너무나 심각하고 더 이상 삶을 이어갈 의미가 없다고 판단될 경우 자신의 의지와 의사의 도움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의료 조력 사망이라 한다. (존엄사, 안락사, 의사 조력 자살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본 책에서는 의료 조력 사망으로 통일해 사용하고 있다.)

국내에서 허용하는 '연명 치료 중단'과는 다른 제도로 환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해야 하며 사망 과정에 의사의 개입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국내에는 아직 이 제도가 불법이지만 캐나다에서는 2016년부터 법제화되어 합법이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오랜 기간 가정의로 활동하면서 생애 말년에 엄청난 고통과 시름하다 차디찬 병원에서 홀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봐왔다.

그래서 저자는 의료 조력 사망 관련 법이 국회를 통과한 순간부터 이 분야에 뛰어들기로 마음먹는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현대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 자체는 매우 길어졌지만 그 최후는 자신이 원치 않는 장소(병원)에서 원치 않는 사람들(의료진)에게 둘러싸인 채, 심지어는 인지 능력 저하로 자아를 인지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맞게 되는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개인적으로도 할머니가 거동이 불가능해 꽤 오랜 시간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경험이 있어 저자의 문제의식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저자는 자신의 일이 그 제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절실하고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의료 조력 사망은 누군가의 삶을 앗아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그들에게 삶을 돌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pg 114)

질병으로 인한 고통만이 환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아니다.

차도가 없는 질환에 계속해서 돈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고, 가족관계나 친구 등 사회적인 관계가 부족해 고립된 채 서서히 죽어가야 한다는 외로움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사랑하는 가족이 아픈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도 마음 편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럴 때 환자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가 의료 조력 사망이다.

만성 질환을 앓는 환자를 돌보는 일은 대부분 가족, 특히 어머니, 배우자, 딸이 감당한다.

그들은 닫힌 문 뒤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힘든 일을 해내면서 밤을 지새우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낮 시간을 견디며, 자신이 돌보는 사랑하는 이에게 닥칠 재난을

막는 유일한 방어벽 역할을 한다.

그들이 지는 부담은 절대적이며, 자기 희생은 계산할 수조차 없다.

(pg 37)

물론 저자 역시 치료가 어려운 병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죽음을 권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고통 완화 프로그램을 충분히 경험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체감이 줄어들지 않거나 삶의 질이 현저히 낮게 유지될 경우 조력 사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의료 조력 사망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고통 완화 돌봄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마치 이것이 양자 선택의 문제라도 되는 듯 반대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각을 세울 때가 많다.

그러나 1년간 독학을 하는 동안 이 두 진영은 같은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 보였다. 환자들에게 가능한 한 가장 다양한 선택지를 주고 양질의 돌봄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고통 완화 돌봄과 조력 사망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pg 39)

물론 그 취지에 동의하고 환자가 직접 선택한, 환자를 위한 방법이라는 것은 잘 알아도 막상 이를 시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한 의료 조력 사망 관련 컨퍼런스에 참석했을 때의 경험을 공유한다.

한 발표자가 의료 조력 사망이라는 의료행위가 이를 시행하는 의사들에게 굉장한 정신적 부담을 주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 돌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솓아나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구제역 등 가축 전염병이 돌 때 가축을 살처분 하는 사람들도 한동안 트라우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하는데, 한동안 자신과 함께 상담하며 해당 과정을 준비해온 환자의 목숨을 내 손으로 거두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의료 조력 사망이 다른 점은 물론 내가 죽음의 사신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책임을 진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기꺼이 지겠다고 동의를 한 짐이다.

그것이 잘못되었거나, 부도덕하거나,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옳은 일이며 친절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게 그것이 짐이라는 사실, 언제나 짐일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pg 65)

책에는 저자가 직접 시행한 여러 환자들의 사례가 등장한다.

그중에는 잘 준비되어 환자 본인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나도 저런 상황이라면 저렇게 죽는 것도 좋겠다' 싶은 사례도 있고, 환자 본인은 시행을 원했지만 성년 자식이 반대해서 끝내 시행하지 못한 사례나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끝내 혼자인 채로 시행하는 의사와 함께 임종을 맞는 좋지 않은 사례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든 사례들에서 이 제도에 대한 저자의 투철한 사명감과 이를 시행하고자 하는 환자들의 굳은 결심을 엿볼 수 있어 가슴이 먹먹해지는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마다 고통의 역치도 다르고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정의도 다 다르다.

스스로 화장실조차 갈 수 없을 때에도 삶을 부여잡고 싶은 사람이 있는 반면, 영화 '미 비포 유'의 남자 주인공처럼 하반신 마비라는 비교적 흔한 장애에도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

저자가 책 내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듯이 이 제도의 가장 큰 의의는 환자에게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 더 열어준다는 것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에게 그저 주어진 고통을 인내하라고,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원해서 죽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비인간적이지 않나 싶다.

인간의 평균 수명만큼 산다고 했을 때 아직 그 절반도 채 살지 못했지만 할머니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경험에 의하면 나는 적어도 할머니처럼 죽고 싶지는 않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죽는다는 사치를 누리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나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고 내 스스로 삶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은 가져갔으면 좋겠다. (쉽게 말하면 벽에 X칠 하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 제도가 아직 국내에는 불법이어서 더 관심 있게 읽은 것 같다.

종교적인 이유, 악용될 가능성 등 여러 이유가 있어서겠지만, 장점만 있거나 단점만 있는 제도는 없을 것이다.

본 제도가 갖는 순기능이 분명 있고 국내에도 이 제도의 도입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건강한 논의를 거쳐 제도화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책이었다.

의료 조력 사망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위안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신이 있다면 자애로운 신일 것이라 믿어요. 신도 제가 한 선택을 이해할 것이라 믿어요."

(pg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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