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에서 디스토피아 세계관은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소재이다.처음 접하는 작가인데 디스토피아 세계관이 매력적인 것 같아 읽어보게 되었다.이 작품의 세계가 끝장나게 된 원인은 포자로 전염되는 전염병이다.특이하게도 뇌에 작용하며 전염되는데 '기억'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알츠하이머 환자들에게는 전염이 잘 안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 병의 정확한 정체는 중반 이후에나 밝혀지는데 책 띠지에 '기억으로 감염되는 전염병'이라는 스포가 붙어 있다. 모르고 보면 더 좋겠으나 알고 읽어도 감상에는 큰 지장이 없다.)그런 세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한 배에 탑승하고 있는 일곱 명이 등장한다.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은 채로 시작하므로 여섯이라고 보면 되겠다. 서로가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 특이하게도 자신의 신상과 관련된 내용만 기억이 나지 않을 뿐, 나라의 이름이라던가 총기류에 대한 지식 등 이전에 학습한 내용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자신들이 모종의 실험체가 되었다는 것과 각자 잘하는 분야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잠시 뒤, 자신들을 그 배에 태운 자로 추정되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데 그것도 기계음으로 처리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해야 할 일들만 간결하게 전달된다. 과연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왜 그 배에 타고 있는지를 알아가는 내용이라 보면 되겠다.기억이 없다면 우린 대체 뭔데? 아무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린 기원도 없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이유가 무엇이든 계속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우리는 죽은 거나 다름없어. 그냥 고통받게끔 되어 있어. 그거야말로 지옥이 아니면 뭐지? (pg 159)일단 전염병으로 인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냈다는 점이 참신했다. 이 병에 걸리게 되면 정신적으로는 기억이 왜곡되고 신체적으로는 급격한 변이가 오게 되는데, 쉽게 표현하면 그냥 살육을 일삼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 그런 괴물들과 싸우며 어딘지도 모를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인물들의 처절함이 작품 전반에 걸쳐 잘 묘사되어 있다.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결말도 제법 괜찮았다.해피엔딩이라 할 수는 없는 결말이라 결말에서 호불호가 다소 있을 것 같긴 하나, 그려낸 세계관 안에서 납득이 갈만한 결말이라 생각한다. 다만 등장인물이 여섯 밖에 안되는데 이들의 매력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웠다.처음에 보여준 인물들의 성격이 작품 끝까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물들의 심경 변화에서 유발되는 재미는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다. 이미 영상화 계약이 완료된 작품이라 하는데 내용상 꽤나 잔인한 부분이 많아 무조건 청불로 나오지 않을까 싶다. 신체적인 변이가 꽤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수준 높은 CG가 뒷받침되어 영상화되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