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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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어떤 책이 마음에 들면 한동안 그 작가의 작품만 쭉 읽게 되는데 이 작가도 그럴 모양이다.

알게 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세 권째 읽게 되었다.

이전에 읽은 작품들이 모두 단편집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다룬 장편이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몇몇 여성들이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시대적 배경이 두 지점인데 이 시대적 구분을 언급하려면 작품의 세계관을 먼저 정리해야 한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기체를 분해할 수 있는 실험 물질이었던 '더스트'라는 물질이 사고로 대기에 퍼지게 되는데 스스로 증식까지 하는 물질이라 지표면의 유기체들은 거의 절멸에 이른다.

모든 바이러스가 그렇듯 이 물질에도 자연적으로 내성이 있는 개체들이 있어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과 돔 형태의 대피소를 만들어 살아가는 이들이 힘겨운 생존 투쟁을 이어 나간다.

이 절멸의 시기를 이겨내고 세계 복원이 진행 중인 시기의 한 식물 연구자가 '모스바나'라는 의문의 식물을 연구하면서 과거의 암울했던 시기를 버티고 생존한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 노인과 모스바나라는 식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둘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밝혀가는 내용이라 보면 되겠다.

과학적인 실험이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이어져 디스토피아가 오는 세계는 사실 식상할 정도로 많이 다루어진 내용이지만 이 작품만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식물이 이야기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일 것이다.

인간이나 동물, 심지어는 로봇이나 기계처럼 일단 움직일 수 있는 대상이 중심이 되는 경우는 너무도 흔한데 정적인 것으로 인지되는 식물이 서사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것 자체가 꽤 참신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아래의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과학적인 관점에서도 꽤 논리적인 접근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피리미드형 생물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식물과 미생물, 곤충들은 피라미드를 떠받치는 바닥일 뿐이고,

비인간 동물들이 그 위에 있고, 인간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셈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pg 365)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다루는 여타 작품들처럼 이 작품에서도 배신과 갈등이 반복되고 그 와중에도 피어나는 인류애와 희망이 등장한다.

전반적으로 절망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이미 그 절망을 극복한 세계가 작중에서 이미 제시되기 때문에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보다는 조금만 더 버텨내면 좋겠다 싶은 안타까움의 정서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또한 미증유의 위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난이 모두 지나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과거는 과거로 묻어버리고 새로운 삶에 금새 익숙해져버리는 인간의 특징도 잘 보여준 것 같다.

지나간 것에 집착하는, 당장 중요한 현실의 문제는 돌아보지 않는 한심한 행태.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아영은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오랫동안 원해왔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pg 82)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어떻게 다시 회복될 수 있는지, 안드로이드와 인간은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 생물 유전자 조작은 어떤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지 등 SF에서 단골로 다룰만한 질문들도 큰 무리 없이 잘 녹여낸 것 같다.

다만 저자의 강박에 가까운 여성 캐릭터에 대한 집착은 단편집을 읽을 때에는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는데 장편으로 호흡이 길어지니 읽는 내내 '굳이 이렇게까지?'라는 의문이 계속 따라다녔다.

더스트의 내성이 성별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것도 아닐 텐데 내성종들의 공동체가 전부 여성이라는 설정은 작위적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런 소소한 아쉬움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다.

저자의 첫 장편이라고 하는데 스토리를 긴 호흡으로 이끌어가는 능력도 탁월한 것 같다.

다만 성별에 대한 강박만 조금 버려주면 어떨까 싶다.

이미 영상화 계약이 완료된 작품이라고 본 것 같은데 원작을 그대로 살린다면 아역부터 노인까지 여배우들만 바글바글하게 나와야 할 테니 PC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는 우려도 된다.

물론 요즘 세상이 원하는 게 그런 방향이라면, 또 결과적으로 잘 팔리고 있다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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