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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석의 여자 - 뮤리얼 스파크 중단편선
뮤리얼 스파크 지음, 이연지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10월
평점 :
처음 접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는 자연히 참신함에 대한 기대가 함께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은 마케팅 포인트로 '서사의 전형성을 비튼다'라고 소개하고 있어서 그 기대를 더욱 높여준다.
보통 기대가 높으면 실망도 클 수 있지만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읽게 되었다.
여러 작품이 수록된 중단편집으로 표제작이 그 시작을 알린다.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혼란스러움'이다.
'서사의 전형성을 비튼다'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스토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욕망을 가진 리제라는 여인이 여행을 떠났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 이야기다.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으면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을법한 내용인데 이 작품에서는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동 이면에 숨겨진 의도나 목적을 독자 입장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리제가 왜 여행을 떠났는지, 왜 타인으로 인한 죽음을 원했는지, 그녀를 죽인 범인은 왜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제는 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며 피해를 입힌 것인지까지도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밝혀주지 않는다.
그저 각 인물들의 행동이 빚어낸 결과를 독자 스스로 숙고하고 그 행동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작품인 것이다.
문학 역시 예술의 한 분야로서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잘 알지만, '저자의 의도'를 오지선다 보기에서 찾아내는 문제를 학창 시절 내내 풀어야만 했던 한국인 입장에서는 더욱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워낙 독특한 맛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호에 가까웠다.
물론 '검은 선글라스'나 '포토벨로 로드'처럼 처음부터 모종의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은 서술이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모든 진실이 빵 하고 터져 나오는 이해하기 쉬운 작품들도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조차도 서술의 흐름이나 사용된 문장들이 굉장히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힘을 준 듯 가슴에 와닿는 문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후반부까지 모두 읽고 나면 앞의 문장들이 마치 다른 뜻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작가가 아무 의미 없이 슬쩍 흘려둔 것 같은 단어의 조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곧 완성되어 버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언급하지 않은 다른 작품들 역시 작가의 스타일대로 독특한 느낌을 충분히 전달해 준다.
중단편들의 모음이니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를 찾기는 쉽지 않다.
책 후미의 작품 해설에 실린 것처럼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의미 등을 생각할 수도 있겠고(실제로 모든 작품의 핵심 인물이 모두 여성이다.) 단지 독자가 부여된 결말까지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의미를 스스로 찾아보길 원했던 작품들의 모음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이 책의 주제는 바로 '거짓'이었다.
굳이 언어의 형태로 발화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몸짓이나 표정 등 다양한 방식으로 거짓을 표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작품에서 주요 서사를 이끌어가는 사건들은 모두 각 인물들이 보여주는 크고 작은 '거짓'들이다.
우리는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든, 타인을 깎아내리기 위해서든, 그저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든 수많은 거짓말을 하는데 그런 거짓말의 끝이 어디로 향할 수 있는지를 다소 극단적인 예시로 보여주는 작품들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사족이지만) 보통 책 후미에 수록된 작품 해설은 자신의 현학성을 자랑하기에 급급해 정작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의 작품 해설은 내용 이해에 꽤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꼭 책을 다 읽은 후 해설까지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