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움벨트가 우리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능력 중 하나라는 점이다.
아이를 키워보면 경험하게 되는데, 어느 날 아이가 처음으로 지나가는 요크셔테리어를 보았다고 했을 때 부모가 그 동물을 '개'라고 가르친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아이는 처음 보는 품종의 개, 예컨대 요크셔테리어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진돗개를 만난다 하더라도 그 동물이 고양이나 돼지가 아닌 '개'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이러한 '유형화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그 무언가를 경험했을 때 본능적으로 그것을 특정 유형에 넣고 싶어 한다.
이러한 능력은 진화적으로 생존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추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의 조상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식물들 중에서 먹어도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부터 구분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을 민감하게 관찰하고 구분하는 개체가 더 오래 살아남아 후손을 남길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능력이 모두에게 있지만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각 사람들마다도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시대나 문화권에 따른 차이도 크게 나타날 것이다.
더욱이 생활터전이 그리 넓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에 비해 지금의 인류는 땅 끝에서부터 바다 깊은 곳에서까지 새로운 생물을 계속해서 찾아내고 있는데 이를 하나의 움벨트로 분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때문에 '분류학'은 꽤 오랜 시간 동안 통일된 체계를 만들지 못해 내외부에서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려왔다.
논란의 핵심은 움벨트가 아무리 인간의 선천적이고 중요한 능력이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주관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과학자들은 수학적 통계를 이용하는 수리분류학, 화학적으로 DNA를 연구하는 분자생물학, 다른 특질은 제외하고 오직 진화상의 새로움에만 의지하는 분기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움벨트를 객관적인 무언가로 대체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