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 - 현대 과학이 외면한 인간 본성과 도덕의 기원
로저 스크루턴 지음, 노정태 옮김 / 21세기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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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발달로 인류는 지구의 생명체 중 처음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객관적인 데이터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존재의 기원뿐 아니라 우리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하는 언행들 역시 진화적인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진화생물학의 견해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원리가 여타 동물들과 그리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정작 과학자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의 발견이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인지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하는데 인문학, 특히 '문사철'로 분류되는 순수 인문학은 그러한 과학의 발달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이 책 역시 철학자인 저자가 과학이 인간을 매우 단편적으로 보고 있다는 시각에 반기를 들기 위해 집필한 책이다.

저자는 과학이 사람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종교와 철학은 물론 예술의 영역에까지 광범위한 인식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축적해온 가치들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단적인 예를 들면, 인류는 자신의 핏줄이 아니더라도 어린이를 보호하거나 노인을 공경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우리의 행동 양식을 유전자가 결정한다고 보는 시각으로는 이러한 행동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어린 개체나 늙은 개체를 보호하는 행위가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인데 물론 진화심리학적으로도 이러한 행동이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유전자 존속에 유리하다고 설명할 수 있기는 하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사회가 추구해 오던 여러 미덕이 현대 사회에서는 점점 더 줄어드는 방향으로, 즉 자신의 삶 외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던 인간의 본성은 대신

마지못해 살아내야 할 무언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바로 이런 "마지못해 살아냄"을 길러내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더 그쪽으로 빠져들고 있지요.

냉소를 존경의 대상으로, 인색함을 멋진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류는 우리의 관대함과 함께 소멸하게 됩니다.

(pg 87)

저자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또 구별되어야만 하는 이유로 우리에게 '인격'이라는 개념이 있으며 이는 단순히 진화를 통해 '획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념적인 활동을 통해 '창발'한 인간 고유의 개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창발'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양적으로 축적된 무언가가 아니라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무언가가 생겨났다는 의미라고 이해하면 된다.

인격은 생물학적인 것에 부가되어 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마치 캔버스 위에 배치된 색깔로부터 얼굴이 창발하는 것과 같이,

생물학적인 것으로부터 창발하는 것입니다.

(pg 74)

인간에게 이러한 인격이 있다는 의미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 역시 자신과 대등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유하고 있는 자신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사유하며 나와 소통하고 있는 상대방 역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가분성을 지닌 개인들이 관계를 형성하고, 책임을 인지하고, 스스로에게 1인칭 시점을

적용한 결과 불가피하게 타인을 2인칭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는 등,

이 모든 것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조건인 것이죠.

그러니 분명 우리는 타자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

다른 이들과 기꺼이 돕고 살기 위해 우리의 감정과 습관을 어떻게 융합해야 할지,

이런 고민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pg 132-133)

우리가 이룩한 사회 역시 단순한 진화의 산물이거나 사회계약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들간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것만이 아니라 순수하게 인간만이 가능한 지적 활동들을 통해 여러 제도와 도덕적 관념을 개발해온 결과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인간 공동체를 다른 관찰 가능한 모든 사회적 동물들의 조직과 구분 짓게

해주는 것은 다층적인 의무와 헌신이며, 우리는 상호 관계에 얽혀 있는 상호책임성의

수준에 따라 그런 의무와 헌신을 받아들입니다. - 중략 -

우리가 의무를 만들고, 수용하고,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의무가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pg 117)

또한 우리는 매 순간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계산해 보지 않더라도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타인에게 인식되지 못하면 자아도 인식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타인을 대하는 특정 행동 양식을 개발해왔고 이러한 것을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른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도덕적 관념은 비록 물리적 실체가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언행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심한 눈으로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가늠하며 사고의 유희를 즐기죠.

만약 제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기 인식하는 행위자의 책임 있는 행태가 도덕성의 뿌리라면, 이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충족해야 할 기준은 불편부당한 타자에 의해 설정되는 것입니다.

(pg 145)

우리는 인격체로서 우리의 행동과 마음 상태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다른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찾는 습관은

우리가 스스로 그런 이유를 요구하도록 만들죠.

그렇게 우리는 남이 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판단의 대상이 됩니다.

스스로의 과오에 대한 인식은 우리를 짓누릅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희구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 알지도 못한 채

회한에 사로잡히기도 하죠.

(pg 217)

전반적으로 과학과 사회학의 발달이 인간의 지위를 상당히 낮추고 있다는 주장이며 인간은 그보다 더 고등하고 고결한 존재라는 일종의 인간 찬사가 담긴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태생적 문과'인 내 시각에서 보더라도 저자의 주장이 생각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물론 나 자신이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그저 관념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유물론자에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자가 근거로 드는 대부분의 것들이 지금은 조금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철학자들의 주장이라는 것이 살짝 실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그러한 관념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같은 종이지만 먹이를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랜 기간에 걸쳐 확립해 온 도덕이나 미덕을 유지하는 것은 과학이나 사회학의 발전과는 별개로 소중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200페이지 정도로 그리 두껍지 않고 서술도 친절한 편이지만 관념과 인식을 다루고 있어서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기술과 학문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인간은 점점 더 경시되는 것 같은지 궁금했던 사람이라면 꽤 통찰력 있는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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