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 세계는 나치 치하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이 세계를 양분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상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과는 160도 정도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정확히 반대는 아니다.)
미국은 일본의 속국으로 등장하고, 독일인이 아닌 백인들은 일본인에 비해 열등한 대접을 받는다.
유대인들의 씨를 거의 말려버린 독일은 다음 타깃으로 흑인을 거의 몰살하다시피 한다.
이런 세상에 특이하게도 두 권의 책이 널리 보급되어 읽힌다.
그중 하나는 '주역'으로 일본을 통해 서방으로 전해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주역에 의존해 점을 쳐보며 살아간다.
정작 동양인인 나도 주역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비록 소설이지만 서양 사람들이 주역으로 그날의 일진을 점친다는 것이 신기했다.
작품 후반에 역자가 남긴 글을 보면 저자가 주역에 푹 빠져서 실제로 이를 활용해 점을 치는 행위를 굉장히 즐겼다고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책은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제목의 한 소설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소설의 설정이 지금 현재 우리의 세계와 비슷한 세계, 즉 독일과 일본이 전쟁에서 진 이후를 다룬 대체 역사물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해당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들에서는 금서로 지정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끄는데 이 책을 집필한 자가 바로 소설의 제목인 '높은 성의 사내'다.
제목처럼 그 소설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다만 여러 평행세계의 하나처럼 과거의 한 사건이 지금 우리의 현실과 다르게 흘러갔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골동품 판매점 주인이나 액세서리 가공업자 같은 소시민적인 인물의 시점부터 일본 정부 고위 관료, 독일 정부의 스파이에 이르는 인물들의 시점까지 다양한 시각으로 묘사해 두었다.
정부 고위 관료와 독일의 스파이는 세계의 존망이 걸린 일들을 논의하지만 그 하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자신의 신분과 인종에 따른 차별과 세상살이의 고단함만이 중요하게 느껴질 뿐이다.
작품은 독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마무리된다.
가장 단순하게는 우리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본인들의 세계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끝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해석은 너무 심심한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멀티버스 개념으로 해석하고 싶다.
마블 등의 영화로 멀티버스라는 개념에 익숙하다면, 본 작품의 세계가 멀티버스의 하나이고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작품의 세계 역시 멀티버스의 하나이며 그 작품을 쓴 작가가 멀티버스 간 정보 이동에 성공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어떻게 해석하든 작품은 재미가 있었다.
이 작품 속에서도 타 행성으로의 진출이나 로켓을 활용한 여행 등 SF 느낌이 나는 소재들이 등장하기는 하나, 세계관 전체로 보면 소품 정도로 활용될 뿐이다.
진짜 중요한 소재는 우리가 사는 세계는 유일한 세계인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절대적인 현실인가와 같은 질문들일 것이다.
이미 드라마로도 제작된 적이 있다고 하는데, 평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현실과는 정 반대인 세상을 그려냈다고 하니 한번 찾아봄직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