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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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표백'이라는 작품을 매우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어쩐 일인지 그 이후로는 작가의 작품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읽을 것을 찾아 신간 페이지를 뒤적이다 눈에 띄는 이름이 있어 책 소개를 보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르인 SF 단편소설집이라는 소개가 있길래 망설임 없이 읽어보게 되었다.

(e북으로 읽었는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서 발췌문에 페이지를 표기하지 못했다.)

표제작으로 포문을 여는데, 제목 그대로 자신이 보고자 하는 풍경을 현실 대신 볼 수 있게 해주는 장치가 개발된 사회를 그리고 있다.

물론 장치를 끄면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지만, 그 장치에 오랜 기간 적응되고 나면 무엇이 현실이고 가상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작품에서는 자신의 뇌에 자신도 모르는 신호가 입력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과학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역시 온전히 자신의 사고와 인지라고 생각했던 영역을 의심하게 된다는 점에서 앞선 표제작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어지는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이라는 작품은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한 바로 그 아이히만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픽션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삽입해 몰입도를 높인 작품이다.

이후에 수록된 '사이보그의 글쓰기'에서는 작가 자신의 현실 이야기를 삽입해 픽션으로 녹여낸다.

두 작품의 배경 시대나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실제를 허구에 섞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나 뇌의 작동 방법에 영향을 주는 장치를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한 작품으로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으로는 마지막 수록작인 '데이터 시대의 사랑'을 꼽고 싶다.

이 책에 등장하는 유일한 사랑 이야기인데 러브 스토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임에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다룬 이 작품에서는 인간 행동에 대한 빅데이터가 개인의 인생 궤적을 꽤나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시대를 그려내고 있다.

남녀 간의 사랑 역시 그 예측 대상이어서 누구와 누가 만나면 대충 몇 년 정도 관계가 이어질지, 어떤 이유로 헤어지게 될지 등을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유진은 인간 삶의 기본 조건에 불확실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 중략 -

어쩌면 불확실성은 그런 조건의 조건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미래가 어떨지 몰라야

사랑하고 모험하고 발견하고 결단할 수 있다.

'데이터 시대의 사랑' 中



하지만 작가는 그런 사회일수록 불확실성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함께 수록된 '아스타틴'이라는 작품에서는 아무리 같은 DNA와 동일한 정신을 이식한 개체라 하더라도 각 개체는 충분히 개성을 발휘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즉 저자는 기술이 인간의 기능을 대체하고 심지어는 인간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게 해줄 수는 있어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스스로 결정한다고 믿는,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능력만큼은 마지막까지 남아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각각의 작품 모두에서 조금씩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정답과 스스로 고른 오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다.

사람은 오답을 선택하면서 그 자신이라는 한 인간을 쌓아가는 것이다.

'당신은 뜨거운 별에' 中

기술이 디스토피아를 낳는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유토피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나는 기술이 우리의 삶과 사회와 복잡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때 우리는 아주 깊은 차원에서 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즉, 우리는 기술로 인해 '변질'된다.

'작가의 말' 中

이전에 '표백'이라는 작품으로 처음 접한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읽게 된 저자의 책인데 특유의 깔끔한 문장과 재미난 소재들, 그리고 전혀 겹치지 않는 여러 이야기들 속에서도 일관된 주제를 말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느껴져서 전반적으로 꽤 만족스럽게 읽었다.

길이가 짧아 아쉬움이 남는 작품도 있었다.

다른 생명체에 가하는 폭력을 삼가기 위해 식물이 되고자 하는 인간이 등장하는 '나무가 됩시다'나 한 명의 DNA로 만든 여러 클론들 중 진짜 후계자를 뽑는 내용을 담은 독특한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였던 '아스타틴' 같은 작품들은 좀 더 살을 붙여 긴 서사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

작가 소개를 보니 집필을 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내가 찾아보지 못한 모양이다.

작가의 스타일이 마음에 드는 편인지라 다른 작품들도 어떨지 궁금해서 조만간 저자의 작품을 또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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