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표백'이라는 작품을 매우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어쩐 일인지 그 이후로는 작가의 작품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읽을 것을 찾아 신간 페이지를 뒤적이다 눈에 띄는 이름이 있어 책 소개를 보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르인 SF 단편소설집이라는 소개가 있길래 망설임 없이 읽어보게 되었다.
(e북으로 읽었는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서 발췌문에 페이지를 표기하지 못했다.)
표제작으로 포문을 여는데, 제목 그대로 자신이 보고자 하는 풍경을 현실 대신 볼 수 있게 해주는 장치가 개발된 사회를 그리고 있다.
물론 장치를 끄면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지만, 그 장치에 오랜 기간 적응되고 나면 무엇이 현실이고 가상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작품에서는 자신의 뇌에 자신도 모르는 신호가 입력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과학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역시 온전히 자신의 사고와 인지라고 생각했던 영역을 의심하게 된다는 점에서 앞선 표제작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어지는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이라는 작품은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한 바로 그 아이히만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픽션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삽입해 몰입도를 높인 작품이다.
이후에 수록된 '사이보그의 글쓰기'에서는 작가 자신의 현실 이야기를 삽입해 픽션으로 녹여낸다.
두 작품의 배경 시대나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실제를 허구에 섞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나 뇌의 작동 방법에 영향을 주는 장치를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한 작품으로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으로는 마지막 수록작인 '데이터 시대의 사랑'을 꼽고 싶다.
이 책에 등장하는 유일한 사랑 이야기인데 러브 스토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임에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다룬 이 작품에서는 인간 행동에 대한 빅데이터가 개인의 인생 궤적을 꽤나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시대를 그려내고 있다.
남녀 간의 사랑 역시 그 예측 대상이어서 누구와 누가 만나면 대충 몇 년 정도 관계가 이어질지, 어떤 이유로 헤어지게 될지 등을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