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를 정의해 놓은 뒤 웜홀처럼 시공간을 구부려 한 점에서 만나게 하면 상호 소통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고 있으며 그 웜홀의 발생 방식이 최면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한 방식으로 예언서를 둘러싼 인물들의 전생들과 현생의 좌충우돌 모험기가 두 권에 걸쳐 펼쳐진다.
전개에 있어서 놀라운 부분은 저자의 방대한 사전 조사에 따른 역사적 지식들이다.
특히 중동 지역 종교 관련 분쟁의 역사를 꽤나 상세히 알 수 있다. (물론 읽고 나면 금세 잊게 되겠지만)
종교를 둘러싼 인류의 갈등은 특정 종교만의 일방적인 박해나 차별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모든 종교가 공통되게 보여오던 모습이기에 그리 새롭지는 않지만, 그러한 사실들이 가상의 예언서를 둘러싸고 절묘하게 섞여 독특한 맛을 자아낸다.
(물론 역사 수업 같은 부분들이 꽤 많아서 이 부분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인간의 인연이라는 것이 이번 생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거듭해 계속 이어진다고 믿는 작가의 사상이 이번 작품에서도 강하게 드러난다.
르네가 예언서를 둘러싸고 만나게 되는 전생의 인물들이 현생에서도 그의 주변에 존재한다.
물론 그가 이러한 전개를 이번 작품에서만 활용한 것이 아니어서 그의 작품을 자주 읽어온 독자들이라면 다소 식상하다 느껴질 수 있을 법한 전개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자신만의 세계관을 계속 확장시켜가고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롭게 읽은 것 같다.
판타지적인 소재를 사용했지만 저자 특유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현실적인 관찰은 이 작품에서도 계속된다.
무조건적인 악인이나 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심과 갈등, 화해와 후회 모두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 중 하나일 뿐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3보 전진, 2보 후퇴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 속에서도 여러 배신과 갈등이 등장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예언에 관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저자는 예언이라는 것이 '존재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앞서 '우리에게 굳이 예언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더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미래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인류의 오랜 욕망이지만, 이 작품 속의 예언서처럼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미리 알 수 있다면 그 정보의 습득 이전과 이후의 삶은 판이하게 달라질 것 같다.
저자는 아래의 문구를 통해 우리에게 예언이란 결국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시각을 넌지시 내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