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미로 필립 K. 딕 걸작선 2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내 출간된 모든 작품을 읽는 것을 목표로 계속해서 달려보는 필립 K. 딕의 장편 소설이다.

그의 장편이 대체로 살짝 정신 나간 스토리를 보여주긴 하지만, 이 책 역시 정신 나간 느낌으로는 다른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특이하게 저자는 이 작품에서 자신만의 종교적 세계를 창조해 낸다.

신의 존재를 실증하는데 성공해서 '중재신', '조유신', '지상을 걷는 자', '형상 파괴자' 등 인류가 직접 마주치거나 소통할 수 있는(!)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안내하기 위한 유일한 경전도 완성되어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작품은 이러한 신학적 배경 안에서 아무 연유도 모른 채 한 행성에 모이게 된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십여 명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제목으로 추론해 보면 등장인물들이 하나씩 하나씩 죽어 나간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성스럽게 적힌 목차를 보고서는 책의 내용을 전혀 짐작할 수 없다.

01장 벤 톨치프가 추첨에서 애완용 토끼에 당첨된다

02장 세스 몰리는 그가 믿던 모든 것들의 상징을 집주인이 수리해버린 것을 발견한다

03장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수 스마트는 능력을 되찾는다

04장 메리몰리는 자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 결과 예기치 못한 상황이 초래된다

05장 배블 박사의 복잡한 재정 상태가 손을 쓸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다

06장 이그나츠 써그는 난생 처음으로 자기 능력을 넘는 힘과 대결한다

07장 세스 몰리는 수없이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푼돈밖에는 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낙담한다

08장 글렌 벨스너는 부모의 경고를 무시하고 넓은 바다로 무모한 모험을 떠난다

09장 우리는 토니 덩클웰트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제 중 하나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본다

10장 웨이드 프레이저는 가장 신뢰하던 조언 상대에게 배신당한 것을 알게 된다

11장 벤 톨치프가 얻은 토끼가 옴에 걸린다

12장 로버타 로킹엄의 노처녀 고모가 찾아온다

13장 낯선 철도역에서 베티 조 범이 소중한 짐을 분실한다

14장 네드 러셀이 파산한다

15장 토니 덩클웰트는 비참한 기분으로 학교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16장 의사가 X선 사진을 검사한 후 매기 월시는 자기가 치료 불능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목차

목차에 그저 숫자나 날짜, 등장인물의 이름 등 별 내용 없이 페이지 구분만 해 둔 작품은 종종 본 것 같은데 이렇게 본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장을 적어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 말 대잔치'에 가까운 글들이니 책을 다 읽은 후 재미 삼아 읽어보면 된다.

심지어는 해당 목차에 등장하는 인물이 그 챕터에 이미 죽어있는 경우도 있고 12장의 로버타 로킹엄의 노처녀 고모 따위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다 읽은 후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목차로 내용을 짐작할 수 없도록 의도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독자들에게 무엇이 진짜 현실인지를 계속해서 의심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정확한 설명은 역자 해설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등장인물의 수가 다소 많아 처음에는 좀 헤맨 것 같은데 각 인물들의 성격이 중반 이후부터는 확실히 드러나기 때문에 책 도입부에 수록된 등장인물 소개 페이지를 자주 참조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의문의 죽음들이 계속되면서 남은 사람들은 행성의 비밀을 파헤치려 하지만 진실은 마치 발이 달려 있기라도 한 듯 점점 더 멀어지다가 결말부에 이르러서야 그 세계의 전모가 드러난다.

스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지만, 역자 후기에 'SF의 뻔한 클리셰로 끝내 평가가 좋지 못했던 작품'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호흡이 긴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넷플릭스의 '블랙미러' 같이 짧은 영상물 형식을 빌린다면 영상화되어도 충분히 재미있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건물'과 감시 곤충들로 대표되는 인공물들이 자연물과 섞여 있어서 어디부터가 의도된 세계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배경 묘사가 탁월한데 이를 세련된 그래픽으로 구현할 수 있다면 굉장히 볼만할 것 같다.

읽어갈수록 그의 작품 세계는 묘한 맛이 있다.

처음부터 엄청난 몰입감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읽다 보면 그 세계에 매료되고 그러다 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은 지점들이 등장한다.

다음에 이 작가의 어떤 작품을 읽을지 고민하는 과정도 독서의 즐거움 중 하나인데 아직 그 즐거움도 많이 남아 기분이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