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에 그저 숫자나 날짜, 등장인물의 이름 등 별 내용 없이 페이지 구분만 해 둔 작품은 종종 본 것 같은데 이렇게 본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장을 적어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 말 대잔치'에 가까운 글들이니 책을 다 읽은 후 재미 삼아 읽어보면 된다.
심지어는 해당 목차에 등장하는 인물이 그 챕터에 이미 죽어있는 경우도 있고 12장의 로버타 로킹엄의 노처녀 고모 따위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다 읽은 후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목차로 내용을 짐작할 수 없도록 의도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독자들에게 무엇이 진짜 현실인지를 계속해서 의심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정확한 설명은 역자 해설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등장인물의 수가 다소 많아 처음에는 좀 헤맨 것 같은데 각 인물들의 성격이 중반 이후부터는 확실히 드러나기 때문에 책 도입부에 수록된 등장인물 소개 페이지를 자주 참조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의문의 죽음들이 계속되면서 남은 사람들은 행성의 비밀을 파헤치려 하지만 진실은 마치 발이 달려 있기라도 한 듯 점점 더 멀어지다가 결말부에 이르러서야 그 세계의 전모가 드러난다.
스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지만, 역자 후기에 'SF의 뻔한 클리셰로 끝내 평가가 좋지 못했던 작품'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호흡이 긴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넷플릭스의 '블랙미러' 같이 짧은 영상물 형식을 빌린다면 영상화되어도 충분히 재미있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건물'과 감시 곤충들로 대표되는 인공물들이 자연물과 섞여 있어서 어디부터가 의도된 세계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배경 묘사가 탁월한데 이를 세련된 그래픽으로 구현할 수 있다면 굉장히 볼만할 것 같다.
읽어갈수록 그의 작품 세계는 묘한 맛이 있다.
처음부터 엄청난 몰입감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읽다 보면 그 세계에 매료되고 그러다 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은 지점들이 등장한다.
다음에 이 작가의 어떤 작품을 읽을지 고민하는 과정도 독서의 즐거움 중 하나인데 아직 그 즐거움도 많이 남아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