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에 지친 그는 죽음을 요구하지만 '자살'이라는 개념 자체가 몇 천년 전에 이미 없어져 버린 터라 누구도 그에게 죽음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길이 바로 '두 번째 유년기'라는 내용이다.
작품의 핵심은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오래 남아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이야 운이 좋을 경우 백 년 정도의 수명을 지닌 우리기에 대부분 죽기 직전까지 기억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살아가며 알츠하이머 등으로 기억을 잃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하지만 수명이 몇 천년 단위로 증가하고 심지어는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때에는 오히려 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작가가 제시하는 주요 질문인 것이다.
앤드류 영에게 있어 그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미 떠나갔고, 누군지도 모를 후손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와 조상이랍시고 경배를 하는 현실은 '새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은 최근의 기억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더 선명하고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는 어린 시절 햇살을 처음 보았던 순간, 나뭇잎을 처음 만졌던 순간, 처음 어둠에 두려워했던 순간 등 살면서 '처음' 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새로움의 감정을 그리워한다.
작가는 그것이야말로 불멸의 세상에서도 힘차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원동력이라고 본 것이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괴로운 이유가 끊임없는 욕망에 시달리기 때문이고, 그 욕망들이 모두 채워진다고 한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권태감 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그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었다.
기껏해야 백여 년에 불과한 삶을 살게 된 현대의 인류도 부여받은 삶을 채 살아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일이 허다한데, 과연 불멸의 시대에 인류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작품의 결말은 결국 앤드류 영이 퇴행 과정을 거쳐 유아처럼 다시 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으로 끝이 나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죽음 뒤에 그의 후손이 삶을 이어 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앤드류 영의 정신이 다시 성장해 5천 년의 세월을 또 살아낸다면 그때에도 같은 일이 이어질지, 아니면 그 사이에 인류가 새로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궁금해진다.
워낙 길이가 짧아 잠깐만 시간을 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작품임에도 읽고 나서 여운이 상당히 강하게 남았다.
던져주는 질문이 많은 작품인지라 '블랙미러' 같은 짧은 SF 작품으로 영상화되어도 재미있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