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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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도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는 학자지만 그의 대표적인 저작들이 인기를 끌 시기가 마침 정신적으로 지금의 나를 형성하게 한 20대 시절이었다.

덕분에 그의 초기 저술들을 꽤 읽었던 기억도 나고 그 유명한 '국방부 불온서적'에 선정되기 전에 군대에서 그의 저작을 읽었던 소중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읽고 나서 다음 휴가 때 집으로 반출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압수될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여하간 그의 이름은 어느새 40을 앞둔 나의 20대 시절을 생각나게 하기에 충분했고, 유튜브를 보다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별 고민 없이 결제하게 되었다.

사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측면에서 그의 사상들은 이미 나온 책들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은 기존에 발간된 책들에서 주장했던 내용들을 식재료라는 아주 일상적인 주제들로 구분해 다시 풀어낸 것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미 그의 저작 대부분을 읽었다면 그리 신선할 것은 없는 내용이지만, 읽기에 진입장벽이 매우 낮은 책이라 그의 저작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장하준 입문용'으로 추천할 만한 책이다.

첫 시작의 문을 여는 '마늘'이라는 식재료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한국인을 정의할 단 한 가지의 식재료를 꼽으라면 누구나 망설임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식재료라 할 수 있다.

이 식재료를 통해 그는 경제학이 우리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을 역설한다.

경제학에는 많은 분파가 있고 각 분파마다 인간의 특성을 다르게 정의하기 때문에 주류 정치에 어떤 경제학 이론이 반영되는가가 바로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의미다.

경제학은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경제적 변수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 다시 말해 우리 자신에 대한 규정 자체를 변화시킨다. - 중략 -

따라서 그 시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경제학 이론은 동시대인들이

무엇을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본질'로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준다.

(pg 33)

기존의 저작들에서 일관되게 주장해 온 '사다리 걷어차기'에 관한 이야기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 책이 나온 지 2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유 무역'이란 단어는 대체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우리 영화가 지금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스크린쿼터라는 제도도 영화 산업을 보호하던 나라라는 것을 떠올려봄직한 대목이다.

개인의 비전으로 성공적인 기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신화는

현재 경제학계의 담론을 장악하고 있는 자유 시장 경제학의 근간이 되고 있다. - 중략 -

그러나 규모가 큰 생산, 복잡한 테크놀로지, 국제 규모의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19세기 말 이후의 환경에서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집단적 노력- 개인의 노력보다 -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기업의 리더뿐 아니라 노동자, 엔지니어, 과학자, 전문 경영인,

정부의 정책 입안자, 그리고 심지어 소비자의 노력까지 모두 포함된다.

(pg 140)

어떨 때는 '소프트 파워'를 사용하기도 한다. 더 학술적인 용어를 동원하자면

'관념의 힘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학계, 국제 언론, 정책 싱크 탱크 등을 통해

개발도상국 스스로 자유 무역이 자국에 좋은 것이라 생각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 중략 - 힘은 보복이 두려워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것이 자기 이익에 만한다고 믿도록 만들기도 한다.

(pg 174)

기존 책들에서는 그리 강조되지 않았었던 편견에 대한 부분도 이번 책에서는 언급이 되고 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코코넛'을 제배하는 지역의 생산성이 낮은 이유가 열대 지방 사람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편견이었다.

언젠가 일하던 조직의 기관장을 모시고 인도네시아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 그분도 대낮에 길에 누워 쉬는 사람들을 보고는 '저러니 경제 개발이 안되지' 하며 혀를 차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날씨에 냉방 시설도 없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매 순간 열심히 일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비인간적인 것 아닌가.(물론 아마존이나 쿠팡처럼 사람이 죽어나가도 '하지만 생산성은 높았죠?'라고 말할 수 있는 기업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노동력의 질은 전문직이나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직종에서는 생산성의 차이를 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종에서 가난한 나라 노동자와 부자 나라 노동자의

개인적인 생산성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점은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 나라로 이민 온 사람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잘 될 것이다.

이민을 왔다고 갑자기 없던 기술이 생기거나

건강이 급격히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닌데 그렇다.

그들의 생산성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것은 더 양질의 사회 기반 시설과

더 잘 기능하는 사회적 체제를 기반으로 해서 더 잘 운영되는 생산 시설에서

더 나은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pg 89)

높은 비율로 여성들이 담당하게 되는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 역시 편견의 하나라 할 수 있다.

GDP에 무급 돌봄 노동은 포함되지 않는데, 이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간단한 사고실험으로 설명한다.

즉 여성 둘이 서로의 아이를 상대에게 돌보게 한 뒤 그 대가로 서로에게 같은 금액을 지불할 경우, 서로의 금전적인 이익이나 아이 한 명을 돌본다는 노동 투입 자체는 변화가 없지만 이 활동은 생산 활동으로 GDP에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주로 여성이 담당해왔다고 여겨지는 돌봄 활동들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혹여 급여가 지급된다 하더라도 돌봄 노동 종사자들의 임금이 낮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편견이라는 점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레시피'라는 단어가 붙긴 했지만 여기서 음식 이야기는 그저 운을 떼는 용도일 뿐이고 본문은 경제학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단순히 가벼운 소재에서 시작할 뿐만 아니라 문장 자체도 기존의 저작들보다는 이해하기 쉽고 재미도 있는 편이다.(이때의 재미에는 '유머'로서의 재미도 포함된다.)

음식처럼 경제학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 편식하지 말고 여러 시각을 경험해 보는 것이 좋다는 충고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오랜만에 저자의 책을 읽었는데 역시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저자의 주장이 사회적으로도 꽤 인기가 많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정도의 반향은 없는 것 같다.

주류경제학의 파워가 워낙 막강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래봐야 무슨 변화가 있겠냐는 체념이 지배하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때가 벌써 20년 전인데 정치권에서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여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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