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슬픔의 거울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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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을 시작으로 작가의 책을 연달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오르부아르'도 읽었었는데 이번에 읽은 책이 '오르부아르'로 시작된 3부작의 마지막편이라 한다.

두 번째인 '화재의 색'은 읽지 못했는데 검색해 보니 다행히 본 작품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는 것 같다.

이 책도 600페이지에 달하는 꽤 두꺼운 작품인데 '오르부아르' 역시 700페이지쯤 되는 분량이다 보니 이 책을 읽기 전에 꼭 '오르부아르'를 읽어야 하는지가 궁금할 텐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선 작품을 읽었다면 반가운 이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꼭 읽었어야 할 필요는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이 작품에서 설명을 다 해주고 있기도 하고, 그저 반가운 이름이 한두 번 등장한다 정도로 가볍게 언급하는 수준이어서 굳이 앞선 작품들을 모두 섭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부담 없이 읽어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오르부아르'가 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했다면,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이야기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 평화롭던 일상에서 시작해 사람들의 평범했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때까지 이어진다.

이 작가의 책이 보통 중반까지는 조금 지루하다가 중반 이후부터 신기하게 재미있기 시작하는데, 이 작품 역시 초반에는 여러 인물들의 시각에서 옴니버스처럼 각기 다른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반 이후부터 이 이야기가 하나의 줄기로 모이면서 굉장한 재미를 느끼게 해 주었다.

역시 이번에도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루이즈는 '오르부아르'에 등장했던 꼬마인데 이 작품에서는 장성해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있다.

어느 날 일하던 음식점에 늘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시간을 보내던 한 노인이 이상한 제안을 하는데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가 갑자기 그 노인이 자신의 머리를 쏴 자살하는 바람에 그녀는 그 의사와 자신의 삶에 감추어진 비밀들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올곧은 성품을 지닌 군인 가브리엘은 같은 부대에 있는 라울이라는 양아치를 만나면서 인생이 조금씩 꼬이기 시작한다.

야바위부터 약탈에 이르기까지 생존을 위해 온갖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라울의 계략에 말려 가브리엘 역시 악행에 가담하게 되고 결국은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전쟁이 심화되고 국가의 행정이 마비되자 죄수를 적절히 처리할 필요가 생겼고, 이 임무를 담당하게 되는 페르낭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편지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그는 원칙상 천천히 말했다.

"아무것도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약속이었다.

(pg 415)

그리고 이 책의 백미이자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디카프리오가 생각나는 역할인 데지레라는 인물이 있다.

처음에는 변호사였다가, 전시에서의 언론 통제를 담당하던 공보국 직원을 거쳐 어느 외딴 마을의 신부로 마무리되는 그의 여정은 그야말로 '말발'의 진수를 보여준다.

계속 신분을 바꾸는 사기꾼이지만 그 역할에 심취해 진짜 성자가 되는 그의 여정은 다소 우울한 다른 인물들의 행보와 대비되어 작품의 재미를 더한다.

전쟁을 다룬 작품이니만큼 전쟁을 둘러싸고 인간들이 보여주는 여러 비이성적인 모습들이 잘 드러난다.

매트리스나 옷장 등 이해할 수 없는 짐들을 싸 들고 피난길에 나서는 사람들,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현금을 불에 태워 없애는 공권력의 모습, 명령 체계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군대, 피란민들에게 바가지요금을 물려 물이나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들까지 전쟁은 인간의 추악함을 다양한 측면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 추악함 속에서도 타인과 함께 살아남기 위한 숭고한 노력들이 포착된다.

자신의 물과 음식을 기꺼이 나누고 버려진 아이를 돌보며 다친 자를 부축하고 거처가 없는 사람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는 존재 역시 인간들인 것이다.

각각의 인물들에게는 여정을 떠나야만 하는 본인들만의 이유가 있지만, 그 여정의 끝은 어느 시골 마을의 한 성당에서 수렴된다.

그리고 그들을 그곳으로 이끌게 된 것은 독일군의 무자비한 총탄이었다.

여정의 계기가 된 여러 이유들은 생존이라는 절대원칙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도움을 베풀고 그 도움들이 모여 불가능해 보이는 그들의 여정이 한 지점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다.

갈가리 찢기고 버려진 이 나라의 모습 자체인 이 피란민의 물결 속에서

자동차는 천천히 덜컹거렸다.

어디에나 얼굴들, 얼굴들이 있었다.

어떤 거대한 장례 행렬 같다고 루이즈는 생각했다.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패배의 가혹한 거울이 된 거대한 장례 행렬이었다.

(pg 459)

작가의 스타일답게 이 작품에서도 절대적인 선역이나 악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동시에 지니며, 자신의 생존을 우선하지만 그렇다고 타인에게 늘 날을 세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그런 양가적인 행보를 조금씩 보여준다.

사기꾼이 성자의 길을 걷기도 하고 지독한 장사꾼이 다리를 다친 동료를 끝까지 책임지기도 하며 자신도 환자면서 다른 환자들을 먼저 돌보기도 하고 자신의 아이도 아닌 아이를 돌보기 위해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가 하면 범죄로 은닉한 돈을 범죄자들에게 줄 음식을 사기 위해 쓰기도 한다.

이처럼 늘 선하게만, 늘 악하게만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또 그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손길도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

띠지에 적힌 '악마 같은 플롯을 지닌 책'이라는 광고 문구가 무색하지 않게 전쟁이라는 참혹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상당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꽤 두껍게 느껴지지만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화재의 색'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조만간 읽어서 작가의 3부작을 온전히 감상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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