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너희 세상에도
남유하 지음 / 고블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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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나 SF, 판타지 쪽 장르 소설들은 그래도 좀 읽어본 편인데 '호러'는 개인적으로 처음 접하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이미 단편집만 세 권이나 낸 작가인데다(후미 작가의 말에 따르면 본인의 사주이기도 하고) 책 소개도 흥미로워서 읽어보게 되었다.

총 여덟 작품이 실려있으며 표제작이 가장 마지막에 실려있다.

표지부터 어딘가 음산한 느낌을 주며 호러라는 장르를 명확하게 표방하고 있는 만큼 수록 작품 전체에 피비린내가 가득하다.

사실 전쟁 영화와 더불어 호러 영화를 가장 싫어할 만큼 잔인한 콘텐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도 전반적으로 잔인함의 수준이 상당히 높고 결말도 굉장히 찜찜한 느낌인지라 읽으면서 심리적인 저항감이 굉장히 심했다.

그럼 읽지 않으면 될 텐데, 희한하게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책이 도착한 날 그 자리에서 여섯 작품을 내리읽었고, 다음 날 오전에 완독했으니 흡인력이 상당했다고 평해도 좋을 것이다.

호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무서움을 즐기듯 보기 싫은데 계속 보고 싶은(?) 묘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소설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기능이 '읽는 재미'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호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책의 재미는 탁월한 편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첫 시작은 의식이 남은 채로 몸이 좀비화되는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상에 비용을 아끼려는 자식에게 버림받는 노년의 감염자가 등장하는 '반짝이는 것'이다.

이 작품의 공포감은 생사의 기로를 앞둔 상황에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주는 긴장감 때문인데, 수록작 중 '목소리'라는 작품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펼쳐진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족의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주는 긴장감이 상당했다.

표제작인 '부디 너희 세상에도'에서도 좀비 바이러스가 주제이긴 하나, 첫 작품과는 결이 매우 다르고 제4의 벽이라는 참신한 방법으로 익숙한 주제의 식상함을 많이 덜어낸 느낌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얼굴보다 더 자주 보게 되는 '화면'을 주제로 한 '화면 공포증'이라는 작품도 우리 주변에 너무도 익숙하게 존재하는 사물이 새로운 공포의 대상으로 전환되는 참신함이 돋보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화면 속 사람들을 동경해왔다.

그곳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타자로 존재하며, 스스로를 주인공 자리에서 내몰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니까.

(pg 111, '화면 공포증' 中)

개인적으로 수록작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에이의 숟가락'이라는 작품이었다.

숟가락이라는 특이한 도구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한 소녀(!)의 이야기인데 짧은 분량 안에서 인간의 뒤틀린 소유욕이 어떻게 정신을 파괴해 가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의 현신이건 살인의 신이건, 숟가락은 에이의 하나뿐인 친구였다.

에이는 자신과 숟가락이 서로를 완벽하게 소유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pg 65)

그 밖에도 이름을 부르면 잡아먹는 괴물이라든가 기시감이라는 느낌으로 미래를 경험하는 남자, 모든 질문에 답을 해주는 뇌의 나무 등 판타지적인 요소를 차용하지만 그 요소들을 우리의 현실과 절묘하게 조합함으로써 판타지와 현실의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기묘한 공포감을 잘 묘사한 작품들이 실려있다.

저자의 이력을 보니 호러뿐 아니라 SF, 로맨스, 심지어는 동화에 이르기까지 창작의 폭이 굉장히 넓은 모양이다.

선택할 수 있는 책들도 많아서 조만간 호러가 아닌 작품도 접해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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