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가격 - 원자재 시장은 어떻게 우리의 세계를 흔들었는가
루퍼트 러셀 지음, 윤종은 옮김 / 책세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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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Price wars', 즉 가격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이다.

여기에서의 전쟁이란 기업들이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벌이는 경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전장을 의미한다.

저자는 원자재 가격이 치솟을 경우 중동, 아프리카, 남미 등 경제적으로 취약한 곳에서 실제 분쟁이나 내전,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이들 지역을 직접 돌아다니며 이 책을 썼다.

저자는 원자재 가격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수요와 공급' 측면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원자재를 대상으로 한 선물 투기 등 금융 파생상품이 원자재 가격 상승에 미치는 영향이 크며 이 대가가 고스란히 원자재 생산국에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모술을 폐허로 만든 파괴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매매된 파생상품의

마법이 나비 효과를 일으킨 결과다.

워런 버핏이 '금융의 대량살상무기'라 칭한 파생상품은 말 그대로

포탄과 박격포, 미사일과 수류탄으로 바뀌었다.

(pg 117)

책에서 주목하는 원자재는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곡물 등의 식량이다.

세 가지 모두 의식주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가격 변동이 사람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품목들이다.

저자는 이러한 원자재 가격의 급격한 변동이 아랍의 봄과 이라크 내전, 브렉시트, 최근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원자재 수급의 변동 폭이 커질 경우 발생하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한 선물 투자는 점차 원자재 생산자와는 전혀 관계없이 숫자를 놓고 돈놀이를 하는 거대한 도박장이 되었다.

저자는 이 시장에서 생산되는 가치는 제로인 반면 부는 굉장히 신속하면서도 불균등하게(원자재 생산 국가에서 금융 선진 국가로) 이전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로 인한 피해는 원자재 생산국의 평범한 국민들이 생활고라는 형태로 견뎌내야 한다.

시장의 혼돈이 현실의 혼돈을 낳고, 이것이 다시 시장의 혼돈을 키우면서

현실과 시장 사이에 놀라운 되먹임 고리가 만들어졌다.

언론, 알고리즘, 자원의 저주 등 혼돈을 증폭하는 여러 장치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가격이다. 가격은 다른 모든 장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pg 133)

이들 지역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알샤바브나 IS 등의 무장 단체들에 끊임없이 새로운 인력이 충원되는 것도 생활고에서 출발한다.

굶어 죽으나 총에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이니 힘으로 빼앗는 쪽에 서다 죽겠다는 판단이 들면 이들 조직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온갖 음모와 선전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도 지울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이 있다.

바로 돈이다.

(pg 199)

원자재 가격이 폭등해 해당 원자재 생산국이 비약적인 수익을 얻을 경우에도 문제는 발생한다.

해당 지역의 정치적 기반이 워낙 불안정하다 보니 갑자기 돈이 생기면 우선 군대부터 증강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자재 가격이 급변할 경우 원자재의 보유 자체가 하나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겠다고 마음먹은 데에는 러시아가 가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의 중요성을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격 전쟁은 국가가 제 앞가림도 못할 만큼 약하거나

이웃 나라에 싸움을 걸 만큼 강해질 때처럼 양극단의 상황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가격 전쟁이 발발한 배경에는 금융 투기가 있었다.

(pg 207)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자재의 가격 변화가 사람들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니니 해당 국가들의 분쟁이나 전쟁에 직접 뛰어들어 살상을 일삼은 자들이 비난받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 못지않게 책임이 있는 거대 헤지펀드들은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 저자는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손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피가 묻어 있다.

헤지펀드들은 각지의 식량 가격을 끌어올려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알샤바브는 소말리아의 식량 가격이 오르자 사람들이 궁핍해진 상황을 기회로 삼아

더욱 잔혹한 일을 벌였다.

그러나 헤지펀드와 알샤바브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알샤바브는 민간인의 식량과 생필품을 빼앗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전 세계의 비난을 받았다.

반면 가격 급등을 유발한 금융 투기자들은 아무런 질책이나 비난을 받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들에게 정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pg 313)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시장에 아무런 규제도 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신자유주의의 이름은 찬란히 빛나고 있고 자본은 국경도 규제도 없이 그저 스스로의 몸집을 불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정치인과 중앙은행들은 금융 카지노의 중심에 있는 룰렛이

쉬지 않고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 중략 -

그들은 사람들을 실업과 압류, 부채의 늪에 빠뜨려 더 빈곤하게 만들고 가난한 나라들을

파산과 붕괴, 혁명과 전쟁 상태로 몰아가는 방식으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인플레이션의 대가는 이번에도 힘없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pg 409)

선물이나 옵션이라는 금융 개념 자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이 발생하는 나비효과를 모두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데, 저자는 최대한 전문 용어 없이 자신이 직접 전장을 찾아다니며 오감으로 체험한 경험을 알기 쉽게 전달함으로써 이 나비효과를 우리도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문장에 현학적인 느낌이 거의 없기 때문에 400페이지가 조금 넘어 살짝 두꺼운 느낌을 주는 책이지만 어려움 없이 술술 읽혔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금융의 칼이 실제 인간의 삶을 도륙할 수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 시장은 오로지 숫자로 표현되는 가상의 재산(실제 화폐조차도 아닌)을 다룰 뿐이지만 그 시장이 가져온 고통은 같은 인간의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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