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999년에 발매된 김영하 작가의 단편집이다.

나온 지 20년도 넘은 책이고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책이므로 삐삐는 보편적이지만 휴대폰은 아직 대중적이지는 않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읽으면 된다.

비교적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지만 나는 도서관에 있는 구버전으로 읽게 되었다.

검색해 보니 다행히 작품의 순서를 제외하면 신버전과 큰 차이는 없는 듯하다.

(e북으로 읽었는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서 발췌문에 페이지를 표기하지 못했다.)

표제작부터 흥미를 끈다.

말 그대로 출근길에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발견한 뒤 별의별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출근에 성공하는(?) 한 회사원의 이야기로,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재미난 문체로 풍자한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은 표제작 이후 등장하는 '사진관 살인사건'이다.

사건의 개요만 놓고 보자면, 주인공 형사가 애먼 사람들만 조사하다 끝나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 담긴 부부 사이를 비롯한 현대인들의 인간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회의가 들게 하는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는 아내에게 별 불만이 없고 인간관계를 귀찮아(?) 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안 해봤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정말 많이 창작되어 나오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현실을 반영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을 때가 많다.

우리의 모든 은밀한 욕망들은 늘 공적인 영역으로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호리병에 갇힌 요괴처럼, 마개만 따주면 모든 것을 해줄 것처럼 속삭여대지만

일단 세상 밖으로 나오면 거대한 괴물이 되어 우리를 덮치는 것이다.

'사진관 살인사건' 중

또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가 보여주는 직장인으로서의 찌듦(?) 역시 너무도 현실적인 느낌이어서 좋았다.

일반인 눈에는 끔찍한 사건으로 기억될 법한 일도 그저 업무의 하나일 뿐인 그에게는 당장 상사의 호출이 더 끔찍할 뿐이다.

상사에게 불려가는 그의 심정이 기가 막힌 문장으로 묘사되어 옮겨보았다.

담배를 던져 끄고 뚜벅뚜벅 사무실로 걸어들어간다.

이럴 때면 어쩐지 내가 피의자가 된 느낌이다.

최근엔 유치장에 창살을 없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오랫동안 그곳에서 지내다보면 갇혀 있는 게 그들이 아니라 나라는 생각까지 든다.

'사진관 살인사건' 중

'당신의 나무'라는 작품도 기억에 남는다.

보통 나무는 생명의 상징으로 많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는 파괴의 상징이다.

작은 씨앗이었던 것이 거대한 나무가 되어 앙코르의 한 유적을 파괴하는 모습과 어느날 시작된 작은 나비효과가 한 남자의 삶을 파괴하는 과정을 대비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당신 역시 당신의 삶에 날아들어온 작은 씨앗에 대해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 머리 어딘가에 떨어졌을,

그리하여 거대한 나무가 되어 당신의 뇌를 바수어버리며 자라난,

이제는 제거 불능인 존재에 대해서.

'당신의 나무' 중

홀로 낯선 땅의 유적지를 찾아 상념에 빠져있던 그는 지나가던 한 승려와의 문답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이 부분이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나무가 왜 무서운가?

이곳의 나무들이 불상과 사원을 짓누르며 부수어나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 중략 -

나무가 돌을 부수는가, 아니면 돌이 나무 가는 길을 막고 있는가.

'당신의 나무' 중

'흡혈귀', '고압선',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같은 작품들은 현실과 판타지를 적절하게 조합해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몰입감을 높여준다.

특히 '흡혈귀'는 작가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어서 더 흥미로웠다.

익숙한 소재고 소설임을 인지한 채 읽고 있으면서도 뭔가 진짜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비상구'와 '바람이 분다'는 사랑 이야기지만 결코 평범하지는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알고 지내기 어려운 범죄자들의 이야기인데 그런 사람들에게도 사랑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듯 자극적이지만 탄탄한 재미가 있어서 시종일관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었다.

이제 김영하 작가가 발표한 소설 작품 중에서 절반 정도는 읽어보게 된 것 같다.

읽으면 읽을수록 참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읽으면서 '이 작가 스타일은 이렇구나' 같은 느낌이 별로 없다.

어느 작품은 굉장히 유쾌하고 어느 작품은 한없이 어두우며 어느 작품은 그 둘을 교묘하게 섞은 냉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단편집 역시 작가의 세 가지 면모를 고루 느껴볼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세월이 지난 지금에 읽어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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