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니시드
김도윤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을 때 현실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당연히 픽션이니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전혀 아니고, 배경 설정과 내용이 잘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 드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책 소개글을 읽다가 한국의 현실을 잘 반영한 스릴러 작품이라는 말에 흥미가 일어 읽어보게 되었다.

작품의 주인공인 정하는 서울의 20평대 전세 아파트에 살며 어린 딸과 아들을 둔 젊은 엄마다.

쇼윈도 부부조차도 아닌, 서로에게 무관심할 뿐인 남편과 함께 그저 아이들 엄마로서의 삶에만 충실한 인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피를 뒤집어쓴 채 부러진 칼을 들고 집에 와 허겁지겁 뒷정리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본능적으로 남편이 무언가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안 정하는 다음날 락스로 화장실의 모든 흔적을 제거한다.

하지만 며칠 후 평소와 똑같이 출근한다는 말을 남긴 채 남편이 돌연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3개월 뒤,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큰 평수에 사는 한 남자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여기까지가 대략 작품의 3분의 1 정도이고 이후에는 이 두 사건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 안에 어떤 비밀들이 숨겨져 있었는지가 밝혀지는 흐름으로 진행된다.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마케팅용으로 쓴 문구들이 거짓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정말 한국 사회 특유의 문화, 한국인이 아니면 공감하기 힘든 정서를 잘 녹여냈다.

특히 쓸데없는 '오지랖' 문화와 이 때문에 발생하는 '남 눈치 보는' 문화를 기가 막히게 보여준다.

이웃들의 온갖 소문을 떠들고 다니는 이웃 아줌마가 매일같이 찾아와 듣기 싫은 소리를 해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욕먹기 싫어 내치지 못하는 정하의 모습은 살면서 한 번쯤은 본 듯한 전업주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우리 집사람에게도 비슷한 동네 친구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나는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남편이 없어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어려움보다도 남들의 손가락질에 아이들과 자신이 받을 상처를 더 걱정하는 모습 역시 '정상적인' 가족의 범주를 넘어선 가정에게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시각이 어떠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내가 그리던 그림 속에는 남편이 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그림 속에 애들 아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편의 자리에 실루엣이 있긴 했지만

그건 다른 남자가 남편이 되었어도 상관없는 역할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남편 역할을 채우고 있던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없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중략 -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라니. 공동주택촌의 뒷담화 소재로 전락하기 딱 좋은 그림이었다.

(pg 173)

초반의 긴장감과 뛰어난 현실 묘사, 그리고 빠른 사건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400페이지가 살짝 넘는 약간 두꺼운 느낌을 주는 책이지만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점이 놀랍게 느껴질 정도로 문장도 읽는 맛이 좋아서 읽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름만으로는 작가의 성별이 짐작되지 않는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리저리 세상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기만 하는 한 여성의 시각을 매우 잘 풀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래 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므로 작품에 관심이 있다면 여기까지만 읽기를 권한다.)

좋은 의도가 깔려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나는 배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노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저어서 어딘가로 가려고 하는데

나에게만 노가 없다.

그들이 저으면 젓는 대로 나는 어딘가로 실려 간다.

(pg 249)

하지만 결말이 결국 신데렐라 스토리로 마무리된다는 점이 다소 아쉽다.

물론 내 주제에 더 좋은 결말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내 상식에서는 돈 많은 남자가 애 둘 딸린 과부에게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극정성을 쏟는 일이 과연 얼마나 일어날까 싶다.

하기야 이 넓은 세상에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사람도 분명 있긴 할 테니 내 시각이 편협하다면 편협한 것이라 생각한다.

쓰레기 같은 전 남편에게 제대로 된 정의 구현이 없었다는 점도 못내 아쉬운데 그것은 또 그것 나름대로의 현실감을 주기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도착한 날 전부 읽었을 정도로 상당히 즐겁게 읽은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영화 '기생충'처럼 한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과 이로 인해 생겨난 기묘한 인간관계를 잘 표현했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치정 문제까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좋을 것 같은 소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앞 동 아파트 남자는 꼭 이선균이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하는데 문장들이 꽤 좋았고 스토리도 흥미로워서 다음 작품에서는 조금 더 속 시원한 결말과 함께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남겨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