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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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를 좋아한다면서 테드 창의 저작을 하나도 읽지 않았다는 것이 부끄러워 도서관에서 저자의 이름을 보자마자 읽게 된 책이다.

(한 영화 때문에 작가의 이름을 들으면 배우 오정세가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유쾌하진 않지만)

현존하는 최고의 SF 작가로 추앙받는데 어떤 매력이 있길래 그렇게 불리는지 궁금했다.

(e북으로 읽었는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서 발췌문에 페이지를 표기하지 못했다.)

총 9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 단편집으로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상당한 몰입감을 자랑하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가 왜 그만한 명성을 누리게 되었는지도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9개의 이야기 모두가 각각 다른 주제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작품마다 느낌도 매우 달랐다.

그 중에서도 하드 SF를 추구하는 작가의 매력이 가장 크게 느껴졌던 것은 마지막에 수록된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는 양자 역학을 활용해 원자 하나를 특정 방향으로 튕겨내면 그 순간부터 우주가 분할되어 다중우주가 형성되고 그 다중우주의 자신과 일정기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마치 오래 전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TV인생극장(개그맨 이휘재의 "그래, 결심했어!"라는 대사로 유명했던)처럼 그 전까지 모든 것이 동일했는데 세상이 분기되고 나면 이후의 선택에 따라 삶의 궤적이 완전히 달라져버리는 다중우주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세상을 이해하는 게 더 쉬워지니까.

그러다 보니, 가끔은 자기 자신을 비난하기도 해요. 비난받을 누군가가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모든 것이 우리의 통제하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중에서

표제작인 '숨'도 상상력 측면에서는 위 작품과 비슷한 충격을 안겨줬다.

보통 SF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기계 인간)들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냈다는 설정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안드로이드가 자신의 근원을 탐색하는 일은 많지 않다. (오히려 자신이 인간인가 아닌가를 탐구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내기 쉽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오직 안드로이드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자신의 뇌를 직접 관찰해 안드로이드의 뇌 작동 방식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는 과학자 안드로이드가 등장한다.

그 안드로이드의 연구 결과 자신들의 문명은 먼 미래에 필연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자신의 우주가 아닌 다른 우주에 있을지도 모를 생명체(예를 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들, 탄소 기반의 생명체인 독자들처럼)에게 남기는 기록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우주에 인간 이외의 지적인 생명체가 있다는 상상력을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시각으로 표현한 그야말로 멋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안이 밖으로 나온 인간이었다.

확장된 뇌의 한가운데에, 해체된 조그만 몸이 위치해 있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형태로 내 몸을 배치해놓고, 나는 나 자신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숨' 중에서

책의 처음을 여는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마치 아라비안나이트를 연상케 하는 배경에서 펼쳐지는 마법 같은 시간 여행 이야기이다.

이 작품만 보면 SF라기보다는 판타지 아닌가 하는 느낌도 살짝 드는데, 책 후미에 실린 작가의 창작 노트를 보면 여기서 등장하는 타임머신이 상대성 이론에 위배되지 않고 상상할 수 있는 형태의 타임머신이라 한다.

하드 SF를 추구하는 작가답게 분위기는 판타지스럽지만 그 배경에는 철저한 과학적 사실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우연도 의도도 태피스트리의 앞뒤 면에 불과합니다.

둘 중 하나를 마음에 들어할 수는 있지만,

한쪽이 진짜이고 반대쪽은 가짜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요."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중에서

그 밖에도 인간의 모든 기억을 동영상 로그로 남겨 재생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의 기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상상해 보는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디지털 반려동물로 탄생한 AI를 돌보는 사회를 그려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미래를 예측하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기계가 발명된 후 결정론이 지배하는 인류 사회를 그려낸 '우리가 해야 할 일' 등 하나하나 길게 소개해도 부족할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으로 가득 찬 책이었다.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중에서

이 세계에서 이십 년 동안 살며 습득한 상식을 가르치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발견적 논리를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합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작가와 작품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 책.

작가의 전작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 역시 단편집이라고 하니 부담 없이 읽어봐야겠다.

출판사에서는 최근에 작품을 접했던 '그렉 이건'과 마치 라이벌인 것처럼 작가를 소개하고 있는데, 두 작가의 작품 모두 훌륭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테드 창의 작품이 읽기에 더 쉬운 느낌이었다.

SF라는 장르에 처음 도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작품은 탁월한 재미를 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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