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시대정신이 되다 - 낯선 세계를 상상하고 현실의 답을 찾는 문학의 힘 서가명강 시리즈 27
이동신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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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르다.

영화는 물론이고 소설도 SF라고 하면 일단 읽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 SF를 문학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책이 그간 몇 권 접했었던 '서가명강' 시리즈로 나와서 읽어보게 되었다.

일단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판타지와 SF는 그 시작점이 비슷하다.

하지만 마법이나 악마 등 순수한 상상에서 출발하는 판타지와 달리 SF는 과학적인 사실이나 과학기술에 대한 전망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SF가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저자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개념으로 노붐(novum)과 인지적 낯섦을 꼽는다.

노붐이란 우리의 정신세계가 뒤바뀔 정도로 새로운 개념의 무언가를 말한다.

저자는 '타임머신'이라는 단어가 처음 소설에 등장했을 때를 예로 들고 있다.

이 작품이 나오기 전에 시간 여행이라는 것은 마법 같은 판타지적인 요소에 불과했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어쩌면 과학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졌다는 것이다.

인지적 낯섦은 독자에게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줘야 한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소설 '듄'의 배경이 되는 아라키스라는 행성은 지구의 사막을 떠올리면 익숙한 곳이지만 그곳에 서식하는 거대한 모래벌레와 그것이 생산하는 스파이스는 굉장히 낯선 것이다.

따라서 좋은 SF라면 노붐과 인지적 낯섦을 잘 갖추어야 한다.

물론 모든 SF가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자 역시 존재하는 모든 SF 작품들 중 10% 정도만 이 기준을 충족하는 작품들이 될 것이라 말한다.

노붐과 인지적 낯섦은 SF 작품의 수준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것은 독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작품이 그 기준이 부합하지 못한다고 그냥 있을 필요는 없다.

작품이나 혹은 작가가 상상하지 못한 것은 독자의 몫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pg 71)

태생이 '현실도피'다 보니 초창기 SF는 과학기술을 활용해 액션 활극을 펼치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주로 쓰였다.

하지만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반성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자 SF는 '외삽'의 형태를 빌어 현실 세계에 깊숙이 접근하기 시작한다.

외삽이란 현재에 어떤 문제나 상황을 좀 더 논리적으로 발전시켜보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환경 파괴가 지금처럼 심화되기만 한다면 결국 기후 문제로 인류 종말이 온다는 스토리들이 외삽을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실 문제를 파고들다 보니 당연히 소재도 다양해지고 플롯과 인물도 더 복잡하고 입체적으로 변화했다.

따라서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외삽까지 감안하면 사실 우리가 사는 현실 자체가 과학의 산물이고 과학기술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SF가 우리 시대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 말한다.

과학기술의 흔적이 직간접적으로 남아 있지 않은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의식하든 못하든 상상하든 못하든 간에 과학기술은 우리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시대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전부 SF라 할 수 있다.

과장해서 말하면 모든 문학과 문화가 SF라고 할 정도다.

(pg 191)

그렇다면 앞으로의 SF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

저자는 우리가 과학으로 밝혀낸 것들은 전체 우주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며, 더 크고 중요하지만 우리가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사변적'인 작품들이 더 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지만 사고 실험을 통해 논리의 끝까지 가보는 작품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이 설명하는 어떤 세계 너머의 과학이 있어야만 한다.

아니면 과학 밖 실재를 이야기하는 소설이 필요하다.

그래서 원칙상으로 이 실험적 과학이 불가능하고

실제로 알려지지도 않은 세상을 상상하는 소설이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pg 207)

저자는 SF 작가들 역시 독자들이 원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책을 끝맺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21세기 독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특별한 책임이 있다.

지금의 상황과 문제를 작품에 대입해서 고민해야 하는 책임 말이다.

공상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공상의 세계를 잇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상상과 비판을 동시에 수행하는 능동적인 독자가 될 책임이 있다.

(pg 236)

서가명강의 다른 책들처럼 이 책 역시 200페이지 정도로 그리 길지 않고 현학적인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읽기에 부담스러운 책은 아니다.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은 뒤에는 단순히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든다, 들지 않는다' 정도의 감상에서 끝나지 않고 노붐, 인지적 낯섦, 외삽, 사변적 사실주의 등의 기준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따져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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